여름의 초입, 그러니까 무시무시한 더위가 이제 막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때쯤 나이지리아에 왔다. 파견 일정이 확정되면서, 나의 소중한 동네친구이자 든든한 새벽러닝크루였던 메텔에게서 에세이 기고 제안을 받았다.
태생부터 인생 흐름에 있어 계획적이거나 치밀한 사람이 아닌지라 내 에세이에 어떤 이야기가 담길까? 나도 궁금한 상태로 이곳에서의 생활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내부로 흐르는 에너지가 무척이나 강한 내게, 너무나도 예외적인 관계를 만들어 준 공사모 멤버들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에세이를 쓰고 싶었다. 나는 시도때도 없이 메모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있는데, 인생의 주 변곡점을 맞이할 때마다 그 주기는 짧아지고 내용은 요동치는 경향이 있다. 재미있게도 파견 생활에 대한 감상이 1, 2, 3개월차에 모두 다르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1개월차에는 파견생활의 비교대상이 ‘여행’이었다.
8년 전 세계일주 당시 첫 행선지였던 동티벳에서 ‘평생 발 한 번 디딘 적 없던 외딴 곳에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라고 여행을 정의했다. 다시 말해 여행은 나에게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는 것’에 초점이 있었다. 반면 해외파견은 그 시작부터 달랐던 점이 평생 발 한 번 디딘 적 없던 곳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여행과는 다르면서 설레는 일인가! 필시 설레는 일이 되어야 마땅했겠다만 당시 내가 쥐고있던 여러 맥락과 고민 속에서 애석하게도 나는 그것을 설렘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자리는 무거운 부담과 책임으로 다가왔고, 잔뜩 힘은 들어가있지만 그 힘을 어떻게 쓸 줄을 몰라 내내 마음의 근육통에 시달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름대로 부단히 분투했다. 그런데 질문을 멈추지 않으려고 노력하다보니 질문은 점점 커지고 내가 감히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무력감이 많이 들었다.

2016년 당시 방문했던 동티벳의 오명불학원
2개월차는 어느정도 환경 적응에서부터 거주지 정착, 물갈이까지 끝났고 이유 모르게 고장나버렸던 몸도 회복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우연찮게 적절한 업무기회들이 찾아오고 조금은 안정된 습관을 형성하면서 제법 거만해 진 것도 같다.
이 시기에는 파견생활을 ‘수영’에 비교했다. 이곳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취미 중 하나로 수영을 꾸준히 하는데 문득 수영과 파견이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은 영법을 몸에 익힌 상태일지라도 컨디션에 따라 편차가 있다. 힘을 주면 몸이 점차 가라앉고, 물에 맞서고자하면 숨이 차오를 뿐더러 물을 왕창 먹게 되면서 속도는 느려지고 다시 몸에 힘이들어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반면 가장 먼저 힘을 빼고서 물을 가지런하게 가르고, 물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는 느낌만 유지할 수만 있다면 자연히 속도가 생기고 자신감이 붙게 된다. 이 즈음 나는 스스로 관리하는 노션 페이지 앞단에 적혀있던 ‘거대하게 느껴지는’ 질문을 아예 지워버렸다. 대신, 힘을 빼고서 작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랬더니 1개월차에 ‘여기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라는 평가에서 ‘그럼 그 자리를 내 것으로 만들면 되지’라는 판단이 섰다.

마음마저 여유로워지는 어느 금요일에 사랑스러운 동료들과 함께
3개월차에 접어드니 이제는 조금 안정된 상태로 앞으로의 길을 흥미롭게 닦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애석하게도 아니다.
지금도 열심히 지나가고 있는 중인지라 아직 이 상태를 객관적으로 조망하기는 어렵다. 다만 오늘 아침,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정전이 또 있었는데 이게 참 나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전원이 켜진 상태를 24시간 유지하지 못 한다는 점에서부터, 계속 꺼지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다시 켜진다는 거다. 이곳에서 나는 조금만 길을 잃으면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아 또 조졌네..’
그러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ADHD의 약점인 자책을 멈추는 법에 대한 정신과 의사의 제안을 보게 됐는데, 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굉장히 위로가 되었다. 말인 즉슨 ‘늘 실패하고 있는 게 삶이다. 실패하는 게 습관이 돼서 아 나는 또 망했네 나 또 인생 조졌네 하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서 다시 해라’ 였다. 그걸 시작으로 뭔가 아 조졌네 생각할 때마다 의사선생님의 말이 떠오르면서 즉각 처방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마음의 안정감이 들었달까? 마음의 보험을 하나 든 듯했다. 전후관계를 여기에서 다 담지는 못 하지만 이른바 ‘조졌네 처방법’을 필두로 나에게 기능하는 마인드셋과 ‘오늘의 하찮은 일들 리스트’를 마련해서 업무 페이지 상단에 두고 매일 상기한다.
해외파견 생활은 모름지기 누구에게나 도전적일 수밖에 없다. 적응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전략을 고려해 볼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 오롯이 나에 대해 이렇게 길게 고민하는 시간이 주어지고 액션을 취할 수 있는 또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 기왕이면 스스로에게 조금 더 단단한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여러 이유로 마련된 마인드셋 우선순위 4가지

상단의 ‘Trivia of Today’ 버튼을 누르면 매일 자동 생성되는 ‘오늘의 하찮은 일들’
3개월을 맞이하는 현 시점까지 내적성장을 중심으로 고민하는 시간을 주로 보냈다면, (바라건대 내적성장이 잘 뿌리내린다면) 앞으로는 외적확장에 집중하고 싶다. 기억도 흐릿한 오래 전부터 본능적으로 끌려왔던 분야가 공교롭게도 다시금 내 주위로 부유하고 있는데, 내가 지혜롭게 잘 연결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다, 라고 이야기 하면서, 요즘 점점 풀리는 날씨에 공사모 멤버들이 여기저기서 모인다는 소식을 자주 접한다. 나 없이도 재밌게 잘 놀 것이 분명한 멤버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비좁아진다. 조금만 덜 재밌게 놀았으면 좋겠네, 라고 이야기 하면서, 멀리서나마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살짝 건네본다. 공사모 멤버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늘 귀감이 되어 항상 내가 더 좋은 사람이고 싶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