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뉴스를 보다 손이 멈췄다. 캄보디아 해외취업 사기 범죄 사건. 청년들의 끔찍한 죽음. 그리고 정부의 캄보디아 ODA 전면 중단 검토. 분노했다. 슬펐다. 혼란스러웠다. 사태를 둘러싼 ODA 관련 논의를 공식적으로 준비하는 한편, 개인적으로는 현장 사무소의 사람들과 프로젝트에 관여된 당사자들을 떠올린다. '지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괜찮을까.'
2017년 DR콩고 파견을 준비하며, 프로젝트 워크플랜, 농업부 파트너 프로필, 위험관리 대장까지. 노트북과 화이트보드 뿐 아니라 내 머릿속도 프로젝트로 꽉 차있을 때였다. "킨샤사는 열악하다", “콩고 프로젝트는 쉽지 않다”는 경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그래서 더 철저히 준비했다. 함께 파견될 PM님도 아프리카 파견은 처음이셨지만, 각오가 단단하셨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2017년 2월, 킨샤사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뭔가 달랐다. 공기부터 달랐다. 아니, 사실 모든 것이 달랐다. 도착 후 일주일 만에 PM님은 PM 자리를 내려놓으셨다. 당혹감과 원망스러움이 밀려왔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현장의 무게가 준비한 것보다 훨씬 무거웠고, 그 사실을 아주 정직하게 인정하신 것뿐이었다. 문서 속 프로젝트와 킨샤사의 프로젝트는 다른 것이었다. 낯선 곳에서, 나는 거의 혼자 남았다.

(2017년 킨샤사의 레아)
반년이 지나는 내내 이슈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은 조금 익숙해졌다. 하지만 8시간의 시차는 여전히 숫자가 아니었다. 서울 본부와의 회의는 대부분 내 시간으로 새벽이나 밤이었다. 낮에 현장 활동을 마치고 밤 10시에 노트북 앞에 앉으면, 서울은 오후 2시. 환한 형광등 아래의 본부 회의실이 화면에 보였다. 내 뒤로는 어둠. 불안정한 인터넷. 끊기면 다시 연결하고, 또 끊기고. "현장 상황이 어떤가요?" 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하면 연결이 끊겼다. 30분을 기다려 다시 연결되면, 회의는 이미 다른 안건으로 넘어가 있었다. '내가 뭘 말하려고 했더라?' 12,000 km의 거리는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었다. 서울의 오후와 킨샤사의 밤은, 같은 프로젝트를 전혀 다른 온도로 경험하게 만들었다.
그 해 연말, 회계 정산에 프로젝트 보고서에 다음 연도 계획까지. 전쟁 같은 시기였다. 마감이 코앞인데 본부와 발주처에서는 연일 독촉 메일이 날아왔다. 그때 콩고에 정국 불안이 찾아왔다.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시위가 거세지자, 정부가 인터넷을 차단했다. 전국적으로. 아무런 예고도 없이.
72시간 동안 완전히 고립되었다. 다행히 미리 준비해뒀던 한국 핸드폰 유심으로 국제 문자를 보냈다. "인터넷 차단. 메일 확인 불가."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이게 현장이구나.’ 사흘 후 인터넷이 돌아왔을 때, 메일함에는 미확인 메일이 수십여통. "마감일 D-1" "최대한 빨리 증빙자료 송부 요망." 나는 웃었다. 울 수도 있었지만, 웃는 게 나았다. '네, 저도 급했습니다. 세상과 단절된 채로.' 같은 프로젝트 속에서 우리는 꼭 벽을 사이에 둔 것 같았다.

(출처: storyset.com)
1년 반의 파견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깔끔한 사무실, 안정적인 인터넷, 편안한 생활. 하지만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도 킨샤사의 밤이 떠올랐다. 회의 중에 갑자기 인터넷이 끊길까 불안했고, 밤이 되면 노트북 앞에 앉아야 할 것 같았다. '나 지금 괜찮은 건가?' 한동안 상담을 받으며 천천히 회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현장에 더 많은 걸 요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자료 내일까지 보내주세요." 현장 파견자가 보낸 요청을 상부에 전달하려 했지만 막혔다. "예산이 부족해요." "이건 계획에 없던 건데요." '아, 내가 킨샤사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이거였구나.'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부는 본부대로, 현장은 현장대로 최선을 다하는데, 구조가 우리를 단절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