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성일 수 있겠으나, 나 어릴 때만 해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한 아이가 늦은 시간에 재래식 변소에서 볼 일을 보고 있는데 불쑥 아래에서 손 하나가 올라오더니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물어봤다는 '무서운' 이야기. 재래식 변소라는 것부터 와닿지 않을 것이고, 갑자기 그 깊고 깊은 구멍 손에서 올라와서 묻는 것이 고작 휴지 색깔이라는 것도 어딘가 우습다. 도대체 이게 뭐가 무서운 이야기란 말인가! 지금 와서 나도 생각해보니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따로 있었는데, 그래서 도대체 빨간 휴지가 뭐고 파란 휴지는 무엇을 의미하냐는 것이다, 어차피 밑 닦는 건 다 똑같은데.
며칠 전 한 기업의 후원을 받아서 지역 내 저소득 학생들에게 학용품을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아직까지 많은 나라, 많은 지역의 학교들이 온라인으로 학교 수업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예상치 못 한 오미크론의 습격으로 인해서 여전히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스마트폰, 노트북은 물론 인터넷 접속 환경도 갖추지 못 한 학생들이 많은 지역일수록 하루 빨리 교문을 열고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모처럼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불러서 학용품 전달식을 한다고 하니 신나게 뛰어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행사를 진행하기 전에 학교 관계자들과 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학용품을 100개씩 전달하기로 하였는데, 갑자기 한 직원 한 명이 지원물품 중 가방은 무슨 색깔인지 물어봐서 검은색과 분홍색 각각 50개씩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 직원은 "그러면 남학생 50명, 여학생 50명 선정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순간 나는 너무 당황했다. 그가 가방의 색깔을 물어본 의도는 다름 아닌 성별 때문이었다. "굳이 남학생에게 검은색, 여학생에게 분홍색을 주고 싶지는 않다. 그런 색깔로 아이들의 성별을 나누고 싶지도 않다. 모든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 색깔의 가방을 받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윗세대인 우리가 우리 편하자고 이런 식으로 구분 짓는 건 옳지 않다." 나는 항변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어차피 남자 애들은 검은색 고를 것이고, 여자 애들은 분홍색 고를 것이다' 였다.
코로나의 여파로 많은 학생들을 초대할 수는 없었고 시간을 나누어서 열 명 단위로 학생들을 초대했다. 후원해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학용품을 나눠주면서 사진도 찍고 짧게 나마 마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응원하기도 하였다. 하루 동안 약 70명의 학생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등교 아닌 등교에 아이들은 모두 신나있었고 (비록 공부와 관련된 것이기는 해도) 선물까지 받으니 더욱 기뻐 보였다. 그리고 가방은, 내 고집대로 아이들에게 물어봐서 직접 고르게 하는 식으로 나눠주기로 했다. 그리고 결과는 - 나 역시도 예상했던 대로였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검은색 가방을 받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분홍색 가방을 받는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 자신의 선택이 전혀 고려되고 존중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남자는 계속 검은색 가방만 받을 것이고 여자는 계속 분홍색 가방만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가방'만의 문제일까? 저 쉼표 안에는 무수한 것들이 들어갈 수 있다. 월급, 직업, 직위, 역할, 말투, 행동… 나는 아이들에게 '색깔'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전달하고 싶었다.
70여 명의 학생 중에 단 한 명의 남학생은 분홍색 가방을 선택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을 놓치지 않았고, 그 기회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어쩌면 이 학생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계속 검은색 가방을 받아왔기 때문에'일지도 모른다. 분홍색 가방만을 받아왔던 학생들은 '나는 다른 색 가방이 갖고 싶다'는 말조차도 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없고 주어진 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성장 환경이 계속된다면, 검은색 가방을 받은 집단이 그 색깔에 권력을 부여하고 더 나아가 그 구조를 고착화한다면 - 분홍색은 영원히 '분홍색'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분홍색'은 계속해서 특정 집단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선택이 모두에게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이 질문은 계속 되어야 한다.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