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에서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둔 문구를 공유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환경이나 와이파이가 없는 낯선 나라, 막 잠에서 깨어난 직후 혹은 술에 잔뜩 취했을 때처럼 비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서둘러 적어둔 메모들은 많은 사람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기록하고자 했는지 보여줬다. 나 역시 파견 생활 동안 수없이 오르내린 비행기 속에서 여러 생각을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해 두었다. 오랜만에 들쳐본 나의 메모장에는 사업 발주처 욕하기, 국제개발협력 살생부 집필 계획, 사업이 망했을 때를 대비한 시말서 초안 등이 기록되어있었으나, 대체로는 기내에서 읽었던 책들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 최은영, 「손길」 (2018)
지금은 소설의 내용도 가물가물하지만, 4년 전에 무슨 생각으로 이 문구를 메모장에 눌러 적어두었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국제개발협력이라는 당시에도 생소하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게 여겨지는 일에 대해서 다들 뭐라도 알고 있는 것마냥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는 것이 너무 싫었다. 기껏 해야 봉사활동의 연장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빈곤한 상상력으로 내 삶을 짐작하려고만 했고 그러면서 부탁한 적도 없는데 내 장래를 걱정해주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그리고 4년 뒤 이 문구를 다시 발견한 지금은 어떠한가? 나 역시도 빈약한 상상력으로 타인의 삶을 걱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동남아시아에서 9년째 파견 생활을 이어가면서 내 경력을 과시해야 할 때에는 서슴지 않고 ‘지역 전문가’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 그 중에서도 한 지역에서 오래 활동했을 뿐인데 과연 나를 ‘지역’전문가라고 칭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단순히 국지적인 공간으로써 ‘지역(Region)’이 아니라 여러 세대를 거치며 사람들의 삶을 일구어 나가고 있는 “지역(Local)”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타인의 삶은 언제나 자신의 삶의 밖에 있으니까.

사업을 수행하다 보면 사업대상국 사람들과 여러가지 갈등 상황에 부딪힌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럴 때면 나는 글로벌 스탠다드라든가 국제개발협력 이론을 들먹이며 상대방을 이해시키고자 하지만 대체로 의미는 없다. 왜냐면 나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내가 경험한 삶에 기대어 그들의 삶을 어림짐작하고 있으니까. 그 지역에서 나고 자라며 무수한 일들을 겪어온 사람들의 역사 앞에서 나는 영원히 타자(他者)일 수밖에 없다. 그 지역에 들어온 것도 ‘나’고, 도와주겠다는 미명 아래 국제개발 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나’다. ‘나’는 영원히 그들의 삶이 들어갈 수 없는 이방인으로 존재한다. 그런 내가 그들의 삶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무능력이다. 이러한 무능력으로 그들의 삶을 짐작하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마치 내 밥벌이를 무례하게 걱정하던 그 사람들처럼.
이것으로 <김치앤칩스>에 기고하는 스무 번째 원고다. 지난 원고들을 돌이켜보면 나는 지역 활동가로 늘 이런 입장과 태도를 고수해왔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데 집중했다. 영원히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를 민망할 정도로 자꾸 들추는 까닭은, ‘지역 전문가’이고 싶은 우리 마음 속에 이런 무능력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스무 번째 외치고 있는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이쯤이면 <김치앤칩스> 편집부에서 ‘해당 글의 내용은 편집부의 의견과 무관합니다’라는 문구 하나 정도 넣어줄 법도 한데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고민은 모두 비슷비슷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