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강독(講讀) 수업이 있었다. 매주 정해진 책을 읽고 와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하는 강독(强讀) 수업이었다. 문학 작품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재미도 있을 거라고 교수님은 말씀하셨지만, 학생들에게는 그냥 한 학기동안 16권의 책을 읽어야하는 수업이었다. 야심찬 강의계획서와는 달리 1학기 수업시간은 침묵으로 가득 찼고, 고뇌에 빠진 교수님은 2학기 첫 책으로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법』을 선정하셨다.
사실 이 책은 그야말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해서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독서와 비독서라는 개념을 통해서 독서라는 행위가 단순히 완독이나 정독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비독서를 통해서 독서의 폭을 넓히고 이를 통해서 총체적 독서를 완성할 수 있다는 내용의 책이다. 제목에 깜빡 속아서 이 책만 읽으면 나머지 15주동안은 대충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학생들이 진실을 마주했을 때에는 이미 수강신청 정정 기간이 지난 이후였다.
내 고장 칠월은 제안서가 익어가는 시절. 많은 비영리 기관들이 이 무렵이면 내년 사업을 위해서 사업 제안서를 쓴다. 좋은 사업을 만들기 위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현장을 방문하고 또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터뷰를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염없이 논문을 읽으며 문헌조사를 하기도 한다. 게다가 왜 하필 사업에 도움이 될만한 연구들은 전부 해외에서 진행되었는지. 어학 공부를 도외시해왔던 내가 영어로 가득한 논문을 마주하는 심정이란, 음식을 남기면 지옥에 가서 전부 먹어야 한다던데 그것도 비벼 먹어야 한다던데 – 그때의 기분이 지금과 같을까?
사업 제안서를 직접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이 사업의 필요성과 당위성이 충분하지만, 그래도 많이 배우신 분들의 권위에 기대어 설명하는 게 좀 더 설득력 있어 보이기에 일부러 논문을 찾아 뒤적거려본 적. 연구 결과를 통해서 사업의 내용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사업의 빈 틈을 채우기 위해서 필요한 논문을 뒤적거릴 때마다, 정말로 ‘읽지 않은 논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필요한 것은 그저 우리 사업과 관련된 연구 결과 한 문장뿐이거늘, 그것을 찾기 위해서 밤낮으로 CTRL+F를 눌러가며 논문을 찾아 헤매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고독한 한 마리의 하이에나 같다.
이런 식으로 필요에 의해서 짜깁기한 연구 결과들로 사업 근거를 마련해도 되는 걸까 싶지만, 나는 또 이렇게 나 자신을 위로한다. 평가위원들 역시 열 댓 장의 제안서로 그 사업이 가져올 미래를 평가하지 않는가? 아니, 어쩌면 시간에 쫓겨 제안서를 모두 읽어보지도 못하고 요약된 개요서나 PDM(프로젝트 디자인 모형)만으로 사업을 판단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제안서를 아무리 자세히 쓰고 유의미한 연구 결과들로 설명한다고 해도 특정 국가, 특정 지역, 특정 사람들의 모습은 담아낼 수 없다. 제안서 안에 빼곡히 담긴 글자와 도표들은 그저 얼마나 우리가 이들의 삶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증명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제안서가 연필로 쓰였다면, 아마도 제안서 여백에서 수없이 썼다 지워진 흔적 속에 사업이 그려낼 미래가 담겨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피에르 바야르가 말했던 비독서의 기능 아닐까?
애정이 없다면 사업제안서를 만들 수 없다. 써본 적은 없지만 아마 논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쓴 제안서나 논문이 끝까지 읽히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비독서를 통해서 완성되는 총체적 독서를 통해서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필요한 내용만 발췌한다고 하여 논문의 가치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듯, 사업제안서 역시 개요서나 PDM만 본다고 해서 내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과도 같은 제안서이기에 좋은 결과 못지 않게 누군가 끝까지 읽어주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부모 같은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 ‘내 새끼’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으면 이 참에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법』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물론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지는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