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서 서울로 온 이주민인 나는 지금은 이화동 벽화마을에 산다. 거리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나름 깔끔하게 정비된 골목 덕분에 쾌적하게 운치를 즐길 수 있다. 사면이 탁 트인 낙산공원에서 보는 서울의 경치와 저녁노을, 건물을 아기자기하게 리모델링 한 까페와 맛집, 한양도성을 따라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도심 속 등산로가 주는 매력에 주말과 평일 저녁이면 낙산공원 주차장에는 빈자리를 찾을 수 없고, 영화나 드라마 촬영하는 모습도 매주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관광지로서 이화동 벽화마을의 전성기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 있다. 그 명성이 낮아지게 된 표면적 이유는 이른바 오버투어리즘으로 인한 부작용. 주민들은 많아진 관광객들이 일으키는 소음, 쓰레기 등의 문제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으나 서울시는 이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었고 주민들의 불편은 커져갔다. 급기야 주민들 중 일부가 페인트로 벽화들을 지워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해당 사건은 무단으로 벽화를 훼손한 주민들이 벌금형을 선고받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으나 이후 관광객의 수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주민들은 편안함을 되찾았다는 평이다.

이화동 벽화마을 벽화 훼손 전/후 (출처: 한국일보)

이화동 벽화마을 벽화 훼손 전/후 (출처: 한국일보)

서투른 행정의 결과 (출처: 중앙일보)

서투른 행정의 결과 (출처: 중앙일보)

하지만 그 내막을 보면 단순히 오버투어리즘만으로 인한 문제는 아니다. 이화동 주민들은 재개발을 원했으나 서울시는 인권, 조화, 거주민 권익보호 등을 내세워 이 곳을 문화도시재생구역으로 설정했다. 쾌적한 새 집을 원하던 주민들의 3~40년 된 구옥 벽면에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약 1년이라는 짧은 사입기간 동안 수많은 외지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마을의 역사, 특징과 무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아름다운 노을빛이 장관인 이화동 마을에 꽃, 천사, 잉어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목소리는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고, 마을의 알록달록함과 관광객들의 복작복작함이 주는 생기와는 달리 주민들의 삶의 질은 내려갔다. 서울시의 증가한 관광객들로부터 주민들의 주거권을 보호하는 노력은 벽화를 그리는 노력에 비해 크게 부족했고, 그나마 상승한 마을의 관광수입도 까페나 게스트하우스를 차리거나 투자한 외지인들에 의해 마을 외부로 유출되었다. 노인 거주비율이 높은 이화동 주민들에게 마을 내 까페나 게스트하우스는 딱히 이용할만한 시설도 아니었다. ‘도시의 자생적 성장기반을 확충하고 도시의 경쟁력을 제고하며 지역 공동체를 회복하는 등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도시재생의 좋은 취지는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고, 이화동을 벽화마을이라는 성공한 듯한 관광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서울시의 서투른 행정은 도시재생의 좋은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이화동 벽화마을을 주민들의 갈등과 경제적 불평등의 온상으로 전락시켰다.

KCOC 주최 ‘일년에 하루쯤’ 행사 관람객용 버전 난민인정신청서

KCOC 주최 ‘일년에 하루쯤’ 행사 관람객용 버전 난민인정신청서

8월 19일 세계 인도주의의 날을 맞아 KCOC가 주최한 ‘일년에 하루쯤’에 다녀왔다. 김칩 특별호로도 소개되었던 이 행사는 분쟁과 나 사이의 관계를 알고 인도주의와 친숙해지는 기회를 제공하는 행사였다. 행사장 초입에서 난민인정신청서를 직접 작성하며 인도주의 세계관에 빠져들수 있었고, 세계 각지의 현장에서 날아온 살아있는 시청각자료들이 인도주의의 이해를 도왔다. UNHCR(유엔난민기구)이 난민들에게 제공하는 물픔 전시도 인상깊었다. 난민캠프나 인도적지원 현장에서 제공하는 식량을 실제로 먹어볼 수 있다면 눈과 귀에 이어 혀로도 인도주의를 느낄 수 있었겠다 싶었다. 하지만 식량 맛보기 체험이 없더라도 일상에서 난민과 인도주의를 가까이에서 느낄 일이 거의 없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색다른 경험을 통해 충분히 나와 분쟁, 인도주의의 관계를 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난민 수용에 대한 반응 예시 (출처: 서울대학교 유튜브)

난민 수용에 대한 반응 예시 (출처: 서울대학교 유튜브)

한국이 난민과 이주민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도 국외를 떠돌며 실향민 생활을 했고, 한국 전쟁과 전후 복구 과정 동안 막대한 지원을 받은 과거가 있기에 사람된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한다. 90년대 초반에 가입한 난민협약을 말하며 인권이라는 이름을 부르짖는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인구절벽을 맞이한 한국의 미래를 위해 이주민을 받아들여 노동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역설한다. 혹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브 잡스 같은 예를 들며 난민 중에 이렇게 훌륭한 이들도 있다고 편견을 깨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한국에서 난민 담론은 어떻게 풀어내든 ‘이슬람에 의한 사회 혼란과 국가 전복’으로 귀결된다. 어떠한 공신력 있는 연구와 통계를 이야기하더라도 많은 이들의 뇌를 잠식한 이슬람포비아는 일체의 대화와 이해를 거부한다. 수십년간 난민을 연구한 연구자도, 존경받는 정치인도, 영화배우도 ‘대화 일절 거부’를 선언한 이들의 불안감에서 기인한 뇌피셜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 평행선의 끝은 어디일까.

다름을 넘어 어울림으로 성장하는 즐거운 학교 (출처: 동아일보)

다름을 넘어 어울림으로 성장하는 즐거운 학교 (출처: 동아일보)

생각해보면 우리는 섞여사는 것이 생경하다. 어려서부터 나이로 나누고, 중고등학교 때는 여고/남고나 여학생반/남학생반으로 나누며 석차로 나누고 우열반으로 나누어 수능 등급으로 최종적으로 나뉜다. 이후에는 대학교 서열로 나누고, 직종이나 취업한 회사의 서열로 나누며, 사는 동네/ 자가와 전월세/자동차로 나눈다. 그리고 그 구분은 대를 잇는다. 하지만 이마저도 한국인들 간의 리그이며 다른 국적, 한국인보다 검은 피부색을 가진 이들은 이 치열한 나눔문화에도 끼지 못한다. 서울로 오기 전까지 경기도 시흥과 안산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청년활동을 한 필자 역시 지역에서 해외 출신 이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본 경험이 거의 없다. 한 도시에 살지만 이주민들이 거주하는 구역과 한국인이 사는 구역이 아예 구분되어있기 때문이다. 이주민 지역에 가면 큰일난다는 교육을 받은 것도 한 몫 했다. 그들과 어울리려면 그들이 사는 지역이 방문하거나 이주민센터에 찾아가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 때 필자가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외국인 노동자들과 한 공장에서 일하긴 했으나 그들은 한국인 무리에 끼기 어려워했다. 한국인들과 동료 간의 우정을 나누는 기억보다 괴롭힘, 인종차별, 멸시, 구박과 같은 기억이 많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했던 공장에 한정된 질서였을 수 있으나 당시 그 곳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겐 한국인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그저 숨죽이고 눈에 띄지 않게 일하고 무탈하게 월급을 받는 선택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러고는 난민들이 범죄를 일으킬 것이라 받으면 안된다고 외친다.

기후위기, 분쟁, 식량난 등 수많은 이유로 인해 늘어날 난민과 국제이주로 인해 우리는 아무리 거부하더라도 결국 지금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이주민들과 섞여 살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좋든 싫든 이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같은 수로 아무리 써도 시점을 지연시키는 것에 그칠 뿐 결국은 그 거대한 변화를 막아내지 못한다. 이는 한국을 넘어 경제성장을 이룬 모든 국가들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잘 섞여 사는 것’은 경쟁력이다. 그 경쟁력은 우리 사회의 실력을 바탕으로 발생한다. 시민사회는 이번 KCOC의 ‘일년에 하루쯤’ 행사처럼 우리 사회가 변화를 제대로 받아들이도록 인권, 양심, 통계와 연구 등 갖가지 언어로 소통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와 정부는 어떨까. 난민심사 과정에서의 불합리한 처우, 예멘과 아프간 난민을 수용했던 과정에서 드러나듯 난민 이슈를 탑다운 식으로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실력도, 바텀업 식으로 시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할 실력도 부족해 보인다. ‘다문화’라는 용어는 통합적인 다문화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그들’을 지칭하는 구분의 언어로 굳어졌다. 내세우는 가치에 비해 부족한 실력으로 인해 가치도, 실리도 모두 잃은 이화동 벽화마을의 사례가 오버랩 되는 대목이다. 잘 섞여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쓰러져 가는 건물에 그림그리는 것이 아닌 잘 섞어 살 수 있도록 판을 다시 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