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개발협력 사업은 대체로 3년이라는 짧은 기간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것보다 더 짧은 것이 있으니 바로 개발 NGO 활동가의 근무 기간이다. KCOC 월드프렌즈 봉사단도 그렇고 국제개발협력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비영리기관 실무자의 근속 기간이 3년 미만인 점을 고려했을 때, 사업 기획 – 예비 조사 – 설계 – 수행 – 모니터링 – 종료 – 사후 평가까지 이뤄지는 하나의 사이클을 모두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사업 수행 기간만 짧으면 3년일 뿐, 그 앞뒤 과정까지 생각한다면 일껏 만들어진 사업은 시한폭탄처럼 여러 사람의 손에 거치다가 결국 터져버린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스타트업이 아닌 이상 이직이나 취업을 하게 되면 진행 중인 사업에 대해 파악부터 하게 되는데, 이제는 정말 착실하게 새 삶을 살겠다던 다짐은 몇 주, 아니 며칠만 지나면 ‘왜 사업을 이렇게 만들었지?’ 로 변해버리게 십상이다. 사전 조사는 충분히 이뤄진 걸까, 왜 여기를 협력 기관으로 선정했지, 이 예산으로 어떻게 이걸 하라는 거지, 타임라인대로 된 게 하나도 없네. 짐작할 수 없는 시간은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업이 되고, 그렇게 서로의 생각은 영원히 닿지 못한 채 결국 “나였으면 이렇게 안 했을 텐데”라는 무의미한 가정으로 귀결이 되어버린다.
전임자라는 사람은 인수인계서를 남겨두기는 했지만 이미 내가 원하는 답은 거기에 없다. 황무지에서 단무지를 찾듯이 공용 메일이라도 뒤적거려보지만, 이윽고 알게 되는 것은 전임자의 유머 감각이 더 심각하다는 사실뿐. 흔들리는 마음을 카드 명세서와 대출 이자를 떠올리며 힘겹게 다잡아본다. 내가 이 사업을 살려보겠다는 심정으로 비장하게 업무에 투입된다는 것은 약 10년 전에 겪은 나의 경험담. 모든 개발 NGO의 근무의 첫 시작이 이러지는 않길 바랄 뿐이다.
얼마 전 개발협력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한 전문가를 만났다. 업무로 만난 자리였지만 일이 곧 삶이 되어버린 활동가에게 사적인 이야기 역시 업무의 한 영역이기 때문에 공과 사가 뒤죽박죽 섞인 대화 속에서, 그분이 과거에 내가 담당했던 사업을 평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내가 이직을 한 뒤 바로 이후였는데, 나의 후임자를 어렴풋이 기억하면서 그분이 현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고생을 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도움 줄 사람 하나 없는 그 황량한 사업 현장에서 그 분은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또 얼마나 원망했을까? 이게 다 전임자 때문이다!

사실 당시 나는 인턴 신분이었고, 비장하게 사업 현장에 뛰어든 것에 비해서 아는 것 하나 없는 뉴비 신입이었다.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책임지고 나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책임질 수 없는 상황으로 나를 떠미는 사람만 가득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인턴 신분이었기에,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움켜쥘 수 있는 것은 침몰하는 배의 갑판보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나와 선수 교체하기 위해서 온 후임자에게 나는 모든 것을 떠맡기고 홀로 떠났다. 다시금 육지로 올라와서 뒤를 돌아봤을 때, 그 험난한 물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분의 모습은 오랫동안 나를 죄책감에 짓누르게 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나 역시 그저 1년짜리 인턴이었다.
후임자가 전임자를 비난하기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전임자는 지금 내 눈앞에 없고, 또 나에게 모든 일거리를 제공한 사람이다. 본디 자기 허물을 찾기 힘들어도 남의 잘못은 잘 들춰낼 수 있듯이 아직 이렇다 할 것도 시작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임자만 탓하는 것은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을 심어준다. 하지만 본인 역시 곧 전임자가 될 것이고, 그런 본인을 탓하는 후임자가 곧 다가온다는 사실은 아직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자신의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만 같은 기분에 취해서 전임자를 탓할수록 본인은 전임자가 왜 그런 선택을 하고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고, 그 전임자보다 몇 배는 잘해야지 지금까지 쏟아냈던 비난을 그나마 수습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여러모로 전임자는 욕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후임자는 전임자가 탔던 배에 올라탄 거니까.
물론 나의 후임자가 나를 비난하거나 탓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듣지 못했다. 괜한 나의 죄책감이 일으켜낸 두려움과 공포이길 바랄 뿐이다. 어쩌면 전임자를 탓하는 것은 주어진 업무에 게으르고 맨날 술 마실 생각만 하는 나 같은 사람이나 하는 짓이지, 개발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활동가들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사업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의 책임 소재를 따지려고 하는 일은 정작 그 현장에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의 고충을 등한시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처음 그 사업이 설계되었을 때의 환희를 떠올려본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랐을까? 개발협력 활동가의 잦은 이직 역시 해결이 필요한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전임자든 후임자든 모두 하나의 뜻으로 좋은 사업을 만들고 이끌어가는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추신, 이 글을 읽고 ‘이 새끼가 혹시 내 전임자였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없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건 분명히 2015년 미얀마에서 내가 겪었던 일이다”고 생각하시는 박ㅅㅂ님이 이 글을 보신다면 공사모 메일로 꼬옥 연락 부탁드립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