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리니 마감이 코앞이다. 쌓인 일을 처리하다 보니 숨 돌릴 틈도 없이 몇 주가 지나갔다. 그나마 조금 여유가 생겨 ‘주말에 뭘 하고 놀아야 하나…’하고 고민하던 중, 불현듯 찾아온 불길한 기운에 혹시나 하고 달력을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에세이 마감일이 겨우 나흘 뒤인데 써둔 게 하나도 없다. 급한 마음에 일단 노트북 앞에 앉아 워드(Word)를 열었지만, 진전이 없다.

생각해 둔 주제가 없으니 당연하지. 괜히 딴짓을 하며 친구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넘겨보는데 눈에 익은 사진이 하나 있다. 7년 전, 르완다에서 귀국하고 얼마 안 돼 먼저 한국으로 돌아온 사람들과 만났을 때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 사진을 다시 보니 오만 생각이 머리를 떠돈다. ‘와, 내가 저 때만 해도 아직 어린 티가 났구나,’ ‘내가 살이 엄청 쪘구나,’ ‘와, 내가 국제개발협력을 시작한 지 벌써 10년째구나.’

르완다 도착해서 처음 찍은 사진. 색감부터 집까지, 마냥 좋아 보였다.

르완다 도착해서 처음 찍은 사진. 색감부터 집까지, 마냥 좋아 보였다.

나의 국제개발협력 파견 생활은 마냥 해외에 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때 부모님의 권유로 파키스탄 단기 의료봉사를 가게 되었는데, 비행기 문이 열리며 들어온 흙먼지의 냄새가 마치 향신료 같아 단숨에 그 나라에 반했던 추억이 있다. 이후 이어진 이주 남짓한 파키스탄 활동은 내게 해외 생활의 매력을 보여줬고, 이때 경험이 르완다를 선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몇 년 후 모잠비크도 잠시 다녀왔지만 국제개발협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다녀온 건 아니었고, 막연히 파키스탄에서의 추억이 좋아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KOICA 국제협력봉사요원*으로 르완다에 파견되었지만, 사실 구체적인 계기는 개발협력과 거리가 멀었다. 당시 나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영국 대학원 진학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직 병역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역, 공익, KOICA, 전문연구요원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KOICA 대체복무제도가 없어진다는 소문도 들리고 약 1년 정도 선발 관련한 소식이 전무했기에 마음을 비우려던 찰나, 폐지 전 마지막으로 한 기수를 뽑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미 합격한 대학원에 대한 미련, 영국이라는 곳과 인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에 많이 고민했다. 봉사단 지원을 새로 준비하는 것도 부담이었고 파견지에서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 긴 공백이 생길 텐데, 이후에 학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불안했다.

결국 대학원을 포기하고 르완다를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주변에서 현역 복무보다는 경력과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KOICA 국제협력봉사요원을 추천하기도 했고, 현장에서 인류학 연구 주제를 찾아보자는 욕심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당시 뭘 알았겠나)

대학원을 자퇴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잠시의 훈련소 생활 이후 르완다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내가 예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류학적 사고? 참여관찰을 통한 문화분석?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패기였다. 문화상대주의를 외치던 나는 르완다 도착 한 달 만에 현지인과 멱살을 잡고 싸울 뻔했고, 매일 학생들을 어르고 달래며 수업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땅에 컴퓨터실을 만들어달라는 기관장을 회유하며 피로도는 급격히 쌓였다. 인류학이고 대학원이고 빨리 끝내고 집에나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파견지로 들어가는 길. 들어가는 것 보다 나오는 걸 더 좋아했다

파견지로 들어가는 길. 들어가는 것 보다 나오는 걸 더 좋아했다

영화나 대중음악 시상식에서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말을 굉장히 많이 듣는다. 항상 처음 일을 시작할 때와 같은 겸손함과 열정을 유지하겠다는 의미이다. 국제개발협력을 시작할 당시 내 초심은 거창한 사명감이나 목적보다는 최대한 편하고 내 커리어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2년 반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데 있었다. 내가 초심을 잃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딘가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거나 한국이나 외국 기업에 취직해서 승진과 연봉 인상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초심은 변했다. 르완다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제자를 가르치고, 곁가지 사업들을 진행하며 흔들렸으며,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는 활동가들을 보며 쪼개지고 재결합되었다. 마치 교수님의 지도 이후 매번 바뀌는 논문의 주제와 내용처럼 르완다에서 시작된 국제개발협력에 대한 내 첫 가설은 필리핀까지 이어지는 십 년이란 경험을 거치며 수없이 엎어지고 지워진 후 재구축되었고, 이제 국제개발협력은 내 업이 되었다.

십 년이 지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는 건 쥐뿔도 없는데 어디 가면 나보고 전문가라고 한다. 가뭄에 콩 나듯 조언이나 커리어 지도를 해달라는 사람도 있고,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도 들어온다. ‘아니 왜 나한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한 십 년쯤 더 지나면 조금 더 아는 게 생기고 자신감 있게 강의나 멘토링을 할 수 있을까? 남들이 나를 보듯 나도 나를 볼 수 있게 될까?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어렴풋이 확신이 드는 건 앞으로도 이 업에 대한 내 관점은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면서 변할 것이고, 나는 그 상황마다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후회되지 않도록 행동할 것이라는 점이다.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당신의 초심은 안녕하신지요. 국제개발을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가짐과 지금의 마음가짐이 같나요? 지금의 선택에 후회는 없으신가요?

p.s. 없는 글머리를 굴려 어찌어찌 글 하나를 또 쓰긴 했다. 공사모에 처음 들어올 때 세웠던 ‘최대한 익명성을 유지하자’는 목표를 지키려고 첫 에세이는 국가나 기관을 빼고 글을 썼지만, 이런 목표마저 결국 마감 앞에서는 휴지 한 장보다 가벼운 다짐이었음이 밝혀졌다. 초심이 이렇게나 변하기 쉽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