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개발새발

처음 파견 현장에 나가 사업 참여자 모니터링하던 때를 기억한다. A4용지 앞뒤로 꽉꽉 채워진 설문지에는 기본적인 인적 정보부터 시작해서 가정 경제 실태, 사업 결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맨 마지막에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세요?”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만약 우리를 모른다고 대답한다면 반드시 기관 이름과 후원처를 알려주라는 설명까지 덧붙여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질풍노도의 시기 이후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답변을 들으러 가는 모니터링 설문에 내가 무언가를 들려줘야 하는지는 몰랐다. 이런 민망한 질문을 꼭 해야 하냐는 나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후원자분들의 소중한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라는 말뿐이었다.

며칠 뒤 나는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였다. 사업참여자가 우리 기관을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은 이해가 됐지만, 나조차도 종종 혀가 꼬이는 그 이름을 억지로 외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검은 머리가 익숙한 아시아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 노란 머리로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동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주목하며 “노란 머리 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일생을 관심종자로 살아왔지만 어쩌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인생의 황금기, 아니 머리의 황금기를 즐기며 매일 매일 모니터링 나가는 날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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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모니터링에서 사업참여자를 만나는 일은, 결국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그리고 만남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된다. 사실 모니터링 활동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기억을 남기려고 하는 것은 국제개발협력 기관만의 욕심은 아니다. 우리 기관의 이름을 사업참여자에게 각인하고 싶어 하듯이, 그들 역시 자신의 상황을 강렬하게 우리에게 알리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면 가끔 모니터링 활동이 불행 배틀이 되어버리거나 일부러 자신의 처지를 더욱 가난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더 기억해 주겠지, 이만큼이나 가난하다고 말하면 나부터 지원해 주겠지. 심지어는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족보가 도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기억하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기억되려고 하는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업참여자를 가난으로 줄 세워서 백화점식으로 지원하던 사업 방식에 있다. 여러 번 지원을 받아본 사람들은 ‘이게 너희가 원하는 데이터잖아?’라면서 마치 퀴즈 정답 맞추는 것처럼 필요한 답변을 해주고, 또 어떤 이는 “내가 이렇게 대답해 줘야지 나중에 평가받을 때 곤란하지 않지?”라고 되레 우리를 걱정해 줄 때도 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누군가의 솔직한 답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지금 내가 하는 것이 모니터링인지 마피아 게임인지. 인터뷰 방식으로 진행되는 모니터링 활동은 결국 그들의 입을 통해서 나온 대답만이 유일한 근거이고 자료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오차 범위를 설정하거나 구체적으로 설문을 설계하여 최대한 객관적이고 진실하게 접근하려고 한다. 하지만 서로의 의도가 지나치게 앞서 있는 이 상황에서 우리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지금 왜 모니터링을 하는 걸까?

확실한 것은 그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대답만이 자료가 된다, 이 전제를 부정하는 순간 서로는 한치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모니터링이란 신뢰의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 번의 답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질문을 잘못 이해해서 엉뚱한 답변을 할 수도 있고 그날 기분이 안 좋아서 답변이 무성의할 수도 있고 유독 이번 달 상황이 평소와 다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들을 만나면서 같은 질문이라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어떤 범위에 도달하게 되고 일정한 경향성을 찾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랬을 때 발밑을 헤집어 보면 그 속에는 반드시 신뢰가 있었다.

노란 머리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날 때, 나는 멋대로 우리가 누구인지 묻는 질문을 생략해 버렸다. 멀리서 내가 나타나면 먼저 손 흔들며 반겨주는 그 모습에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는 노랗고 남자가 무슨 귀걸이를 하고서는 또 팔에 문신까지 있어서 처음에는 나쁜 사람인 줄 알았다던 동네 아주머니도 이제는 만나면 먼저 너스레를 떨면서 A4용지 서너 장은 넘길 만한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는다. 우리가 지금 모니터링 설문 조사라는 것도 잊은 채 떠들다 보면, 이제 이 안에는 가장 진실한 무엇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니터링을 하면서 모니터링이 아닌 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발견되는 것. 누구도 기억해달라고 하지 않았고 누구도 기억되려고 하지 않지만 정밀하게 설계된 설문지 안에 담을 수 없는 것이 눈에 보인다.

처음 한 번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강요되는 기억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쌓이는 추억으로 빚어지는, 나랑 너랑 그사이에 반짝이는 그 믿음을 만들어 가는 일이 사실 모니터링의 목적이 아닐까?

※ 본 에세이의 제목 <너랑 나랑 노랑>은 오은 시인의 에세이집에서 따온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