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원고는 정말 원고는 정말 할 말이 없다. 마감을 일주일이나 늦춰가면서 시간을 더 달라고 했지만, 도무지 쓸 이야기가 없다. 문장 한 줄 쓰고 지뢰 게임 한판 하고. 이걸 몇 번 반복하면 정해진 분량을 채울 수 있겠지. 물론 내게도 최근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파견 10년 차, 현지에서 만난 분과 다음 달 결혼을 하기도 하고, 신규 사업 공모를 위해 캄보디아 출장을 다녀왔고, 시답잖은 소설이라 생각했는데 꽤 괜찮은 작품 몇 개를 읽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나는 무언가에 대해서 말할 준비가 안 됐다. 나는 할 말이 없는데 왜 꼭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 나의 일상을 들춰내야만 하나요? 그렇다, 사실 이것은 짧은 시간 내 사업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국제개발협력계의 경종을 울리는 성찰의 에세이다.

얼마 전 신규 사업을 PT하는 자리에서 “3년짜리 사업 PDM에 임팩트는 왜 적어왔냐?”는 말을 들었다. ‘임팩트 적는 칸이 있으니까 적어왔는데요.’라는 말이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현장에 있다 보면 임팩트는커녕 성과조차 찾아내기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PDM에는 그럴 듯 성과 지표를 기입한다. 마치 이 에세이의 분량을 반드시 다 채워야 하는 것처럼, PDM에 빈칸을 남겨두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PDM은 ‘논리’ 모형이다. 무엇을 달성해야 하는지 증빙해 내는 수단이 아니다. 임팩트가 해당 사업이 어떠한 방향성을 갖고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정표라면, 성과와 산출물은 그곳으로 향하는 여정이 얼마나 논리적인지 보여주어야 한다. 각각의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을 보여주는 모형일 뿐, 임팩트라는 엔딩을 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퀘스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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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발주처에 사업이 ‘정상적으로 굴러가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달성 가능한 지표들로 우선 설정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충분히 이해한다. 사실 많은 경우 사업은 논리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활동을 투입했으면 기대했던 산출물이 나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성과 관리 모니터링을 나갔는데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고 이해관계자들이 지금은 할 말이 없다고 한다. 그게 사실인데, 현실은 보고서 제출 기한이 맞춰서 뭐라도 찾아내야 한다. 정말이지 이럴 때면 나는 ‘할 말 없음’이라고 제출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본부 부장님을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직업을 잃는다. 이것은 잘못 설계된 탓이기보다는 (물론 그럴 가능성도 높기는 하다) 사업을 만드는 우리가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일 때가 많다. 하지만 어쩌면 이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국제개발협력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PDM 가장 오른쪽에 적는 ‘가정(Assumption)’은 사실 우리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지표다. 개인적으로 “이러면 참 좋을 텐데”의 고귀한 표현 정도쯤 된다고 생각한다. 그 ‘가정’대로만 일이 돌아간다면 참 좋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현실’보다 앞서 나가면 우리는 ‘할 말 없음(N/A)’을 만난다. 좀처럼 논리적이지 못하고 나약한 우리의 ‘생각’은 사업 성과 보고로 말미암아 현실의 속도와 나란히 가지 못한다. 논리 모형이라더니, 짧은 시간 안에 활동으로 산출물을 만들고 성과까지 내야 하는 일련의 과정은 하나도 논리적이지 않다. 처음부터 우리가 논리적이었다면 세계 빈곤 문제를 100년 가까이 해결하지 못했을리도 없겠지만.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부재(不在)’일 뿐 ‘부정(不定)’이 아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문제일 수도 있고, 아직은 확신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생각이 앞서는 바람이 생기는 이 ‘부재’가 마침내 표현되기까지 많은 것들이 필요할 수 있다. 수 없는 맘속을 헤매며 끝없이 혼자 되뇌다가 마침내 입 밖으로 꺼내야만 ‘좋아한다’는 맘이 말이 되는 순간처럼, 우리가 만든 사업에 필요한 것은 논리의 확증이 아닌 시간의 확장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에세이는 한국 국제개발협력계의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성과 관리에 괴로워하는 담당자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이런 말씀도 있지 않은가.

“이 안에 멋지고 놀라운 걸 심어뒀는데 아직은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야, 나의 비밀 정원.” 오마이걸(2015 - 현재)의 5집 미니앨범 <비밀정원>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