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칩 새해 첫 호의 에세이를 내가 맡는다고? 이런 꿀 같은 찬스를 놓칠 수는 없지. 새해 첫 글만큼 날로 먹는 주제 잡기 좋은 게 또 없는데 나한테 돌아오다니 운이 너무 좋다. 남은 올해도 이 운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는데…

분명히 어제 시작한 것 같던 2023년이 다 끝났다. 한 해의 끝을, 그리고 또 다른 해의 시작을 마주하며 지난 1년 내가 뭘 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돌아본다. 습관적으로 ‘숨만 쉬었더니 한 해가 다 갔다’라고 얘기하지만, 지난해는 특이하게도 업무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공적으로 사적으로 참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경험하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던 한 해인 것 같다.

재작년부터 해왔던 사업이 작지만, 뜻깊은 열매를 맺은 것이 먼저 기억에 남는다. 재작년 말 회사 본부에서 주도한 기획의 하나로 필리핀 레이테섬의 한 마을에서 만성병 관련 사전 조사를 진행했었다. 특히 건강의 사회적 요인을 조사해서 어떠한 해결책을 도입할 수 있는지 분석해야 했는데, 지역의 자료가 매우 적었고, 수집되던 것 마저 아주 정확한 자료는 - 특히 COVID-19 때문에 - 한동안 취합된 적 없어서 분석에 매우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다. 어찌어찌해서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우선순위로 판단된 문제에 대해 최대한 추가 자원의 소모 없이 도입할 수 있는 해결 방안을 개발, 올해 초에는 다시 한번 지역에 방문해 이해관계자에게 간단한 발표와 함께 해결 방안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했었다.

아쉽게도 사업은 본부에서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아 나도 투입이 중단되었고, 이후 다른 사업을 하며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지난달 초에 상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본부 사업은 중지됐지만 현지 이해관계자들이 자체적으로 계속 진행하고 있었고, 이게 중앙 보건부의 눈에도 들어와서 다른 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고. 겉으로야 알았다고, 도움 필요하면 말하라고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너무 기뻤다. 회사에 들어와 처음 맡은 사업이 중단되어서 조금 서운했는데 그 뒤로도 알아서 잘 커가고 있었고 이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하니 계속 노력해서 지금의 성과를 보여준 지역 보건 인력이 정말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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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보건청 앞에서 찍은 사진)

조금 힘들었던 기억도 있다. 작년 하반기에 조금 길게 태평양 도서국 중 하나에 출장을 갈 기회가 있었다. 현지 보건 인력 역량강화 사업이었고 나도 유사 사업에 대한 경험이 없진 않기에 당연히 수락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그런 - 소위 낮은 모래섬에 야자수 하나 서 있는 - 나라에 가보겠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렇게 사업이 계획되고, 여러 절차를 걸쳐 결국 8월 중순에 3일간의 비행기 경유를 통해 그 나라에 도착했다. 나라 이름을 적지 않는 것은 그 나라가 너무 좁아서 이름을 공개하면 내가 누군지 바로 특정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뭐 이제 와서 이게 의미가 있나 싶기는 하지만…

그 나라는 정말 내가 생각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너무나 좋은 날씨와 해변은 내가 섬에 일을 하러 온 건지 휴식을 하러 온 건지 때로는 헷갈리게 할 정도였고, 사람들도 너무 착하고 친절하고 의욕이 넘쳐서 같이 사업을 진행하는 재미도 있었다. 문제는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다. 외식할만한 식당은 한 손으로 세고도 손가락이 남았고, 섬의 유일한 술집은 운전해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결국 퇴근하고 해가 떨어지면 집에서 가져간 영화와 드라마, 독서와 게임을 했는데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중에는 그게 그거같이 느껴지더라. 평소 아주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내가 사람들 만나는 걸 꽤 많이 즐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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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공항 뒷편에서 찍은 바다 사진. 예쁘긴 참 예쁘다)

2023년은 또 주위 사람이 많이 바뀐 해이기도 하다. 재작년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내 팀은  1년 선임 한 명, 그리고 나와 동기들 셋을 포함해 총 다섯 명이었다. 동기 중 하나는 작년 초보다 성향에 잘 맞는 자리로 이직했고 나머지 동기 둘은 재계약을 하지 않아 나와 선임 둘만 남았는데, 선임마저 같은 부서 내 다른 자리로 옮겨갔다. 작년 중순에는 후임 두 명을 새로 뽑아 팀 인력을 충원했는데, 이 중 하나는 라오스에 있는 국제기구에 취직해 바로 집으로 돌아가서 비자를 기다리고 있고, 다른 하나는 회사가 있는 도시에 적응을 못하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태 자라 온 곳과 분위기가 아주 다르더라.) 마음고생하고 있다. 지금은 연말-신년 휴가를 가 있는데 부디 잘 회복하고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얘마저 없으면 내가 일을 다 해야 하는데 그러긴 너무 싫어.

주변 친구들의 신변잡기에도 참 많은 변화가 생겼다. 다들 왜 이리 결혼에 출산을 하는 건지, 몇 푼 들어있지도 않은 내 통장 잔고를 다 털어내겠다고 나만 빼고 모여서 작당이라도 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이 돈을 돌려받을 기회가 생기기는 할까, 가지도 못하고 밥도 못 얻어먹는데 돈을 보내는 게 맞나 싶다가도 결혼식용 사진의 멀쩡하게 서 있는 그 녀석의 모습을 보면 아니 얘가 맨날 같이 술에 취해서  놀던 걔가 맞나 하면서 축의금을, 100일과 돌을 맞은 아기의 사진을 보고선 삼촌이 조카 과자 정도는 사줄 수 있다고 하면서 또 카카오톡 선물을 어찌어찌 느린 인터넷으로 보내게 되더라. 너희, 나중에 나 한국 가면 절대 모른척하면 안 된다..

그리고 다들 왜 이리 공부는 많이 하는 건지. 심심찮게 대학원 석박사에 언어 공부 한두 개씩은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나는 여기서 맥주를 열심히 홀짝이며 구경하곤 한다. 가끔 술에 쓰는 돈을 줄여서 학비를 번다거나, 더 나이 들기 전에 박사를 해야 한다거나 - 언제까지 척척 석사로 남을 수는 없지 않겠냐는 수많은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음. 어림도 없지. 맥주는 포기 못 해.

가장 뜻깊은 것은 올해 내가 공사모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업계에 들어와 사업을 하면서도 원체 내향적이고 주변 네트워크가 좁아 아는 사람이 많이 없었는데, 평소 즐겨보던 김칩을 만드는 공사모에 지원하며 참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내 눈앞의 일을 떠난 많은 작당을 해볼 수 있게 됐고, 다른 섹터, 다른 기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자유로운 의견의 공유를 통해 내 사유가 넓어질 수 있었다. 너무나도 재밌게 보던 김칩을 통해서 지난 10년간 어디에도 쓰지 못한 내 생각을 익명(....맞지?)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너무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아마 2023년에 한 결정 중에 공사모에 지원한다는 결정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장 좋은 구매는 빈포선셋 후디 구매고.

여러분의 지난 1년은 어떠셨나요? 업무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떠한 변화가 있으셨나요? 좋은 기억, 나쁜 기억 다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두 좋은 기억은 가슴에 꼭 지니고, 나쁜 기억은 지나간 달력처럼 넘겨버리고 행복한 새해를 맞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지난 2023년 한 해에도 김칩을, 그리고 공사모의 행보를 사랑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구독자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꾸준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2024년에도 계속 재밌고, 웃기고, 때로는…아마도…유익한 활동을 이어가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올 한해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