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하나

벌써 한 10년쯤 됐나, 르완다 살 적의 이야기다. 주말이면 항상 그러듯 아침 일찍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수도 키갈리로 올라왔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근처 모토(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려는데 기사가 위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키갈리 운전기사가 그 지역을 모르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서도 내가 길을 잘 아니 일단 근처로 가자고 협상하고 - 다행히 어딘지 대충은 아는 듯싶었다. - 호기롭게 출발했다. 그렇게 한 10분쯤 가니 이제 길을 물어보기 시작해서 이리 꺾어라 저리 돌아가라 뒤에서 알려주는데, 기사가 이해를 잘못하고 온갖 골목길을 다 헤집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나라고 그 지역을 다 돌아본 게 아니니 거진 20분을 계속 헤매고, 이제 여기가 맞나 하고 가물가물할 때쯤 겨우 숙소 근처 아는 길로 빠져나왔다. 여기서 얘랑 더 다니다간 제시간에 숙소 못 들어가겠다 싶어 그냥 멈추고 내리는데 우리 기사 형제님이 한마디 한다. “너 영어 너무 못해서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제발 공부 좀 해.”

에피소드 둘

지금 파견되어 있는 키리바시에서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급하게 본업이 아닌 다른 업무 지원을 맡게 되어 모르는 부처 사람들과 회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행히 사업 내용 자체는 주워들은 게 있어 얼추 아는 내용이라 큰 부담 없이 들어갔는데 문제는 내가 회의 참가자를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굉장히 소심한 성격인지라 모르는 사람에게는 쉽게 말도 잘 못 걸지만, 기관에서 대표랍시고 와서 앉아있으니, 뭐라 한마디 해야지. “안녕, 나 비케니베우 (회의 장소 옆 동네)에서 왔어.” 어설픈 현지어로 한마디 하니 다들 깔깔 웃는다. 완전 현지인 다 됐다고, 그냥 눌러앉아서 살라고 한다. 다행히 시작이 좋아 회의도 원만하게 끝냈는데, 이제 사무실이나 주위를 다니다 그 사람들을 마주치면 자꾸 웃고 현지어로 말을 건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그날 했던 한마디가 전부였는데.

에피소드 셋

2006년 일이니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의료봉사라는 것을 가게 되었다. 파키스탄이었다. 가기 전 참가자들이 한곳에 모여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는데, 파키스탄 문화라던가, 역사에 대해 잠깐 배우고, 하게 될 업무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중에는 우르두어로 된 환자들에게 해야 할 말 - 저기로 가세요, 이리로 오세요, 약 드세요, 눈 뜨세요. 등등 - 이 있었는데 지금도 못 하는 공부 그때는 잘했을까, 파키스탄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는 이미 전부 까먹은 뒤였다. 뭐 어찌 됐든 파키스탄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했다. 초반 며칠은 이동하고 짐 나르고 하느라 딱히 현지어를 쓸 필요가 없었지만, 며칠 후 진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환자들과 소통해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기 전에 배웠던 우르두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사람들 약은 줘야 하니 온갖 몸짓, 표정을 다 써가며 설명하던 그때, 너무 답답한 나머지 한국어가 저절로 나온다. “어머니 약 넣어야 하니까 눈 뜨세요.” 하니 와. 바로 눈을 뜨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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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공고의 필수요건인 영어 구사 능력과 대학 졸업자. 이렇게까지 필요한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개발협력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언어와 소통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지 않는 편두통처럼 머리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영어에 대한 부담감은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을 텐데, 어떤 기관이건 모집공고에 영어 구사를 필수요건으로 넣어 일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심리적인 장벽을 만들기도 하거니와, 일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영어로 진행되는 회의를 참가한다거나 수십, 수백 페이지 보고서를 영어로 쓰는 것은 아무리 초중고 12년 영어를 배운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10년 외국물 먹으면서 이쪽 일을 해 왔지만, 나는 아직도 보고서를 쓸 때면 탭 하나에는 네이버 한영사전을, 탭 하나에는 Grammarly(아직 안쓴다면 무조건 써라)를 켜두고 시작한다. 아, 요즘은 하나 더 있다. 챗 GPT는 신이야.

어느 정도 영어를 사용하는 업무에 적응이 됐다 싶으면 이제는 변화에 대한 욕심이 스멀스멀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한다. 다른 기관, 다른 업무, 다른 현장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생기는 건 당연한 건데, 한 번씩은 여기서 국제 NGO나 국제기구 취직을 생각하곤 한다. 인턴십과 UNV, KMCO, JPO 등 여러 루트를 알아보며 자격과 요건을 맞춰서 준비하게 되는데, 항상 나오게 되는 질문 하나: “제2외국어 필요한가요?”

마치 공식처럼 아프리카와 유럽을 생각하면 프랑스어, 남미를 생각하면 스페인어를 배우라는 답변을 받고, 여기에 곁다리로 아랍어, 러시아어, 중국어가 언급된다. 아프리카에도 스페인어 사용 국가가, 남미에도 프랑스어 사용 국가가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언어 하나 더 해서 나쁠 건 당연히 하나도 없다. 취직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행과 생활의 질을 높여주기도 한다. 시작이 어렵지, 언어를 배운다는 건 사유의 깊이, 삶의 지경을 넓히는, 항상 추천하고 권장할 일이다. 그래서 나도 프랑스어를 배워야지 배워야지 말만 계속하다 최근에 듀오링고를 시작했다. 목표는 벨기에 수도원 맥주 여행, 그리고 프랑스 남부 와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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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연 업무에, 그리고 취업에 도움이 될까? 당연히. 근데 얼마나?

더 하기 전에 미리 밑밥을 깔고 들어가자. 언어를 하나의 학문으로서 배우거나 아니면 긴 현지 생활을 통해 이미 고급 수준의 언어 구사 능력 (UN 공식 언어 중 하나건, 그 외의 언어건)을 갖춘, 즉 언어 그 자체로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에게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발 협력 업무를 하면서 조금 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현장에서 조금 더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언어를 하나 더 공부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말이다. 계속 강조하지만, 언어는 당연히 배우면 좋고, 지금부터라도 꾸준히 공부하길 권장한다. 하지만 이것이 최우선 순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프랑스어를 예로 들어보자. Ethnologue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세계에 약 8천만 명이 있다고 한다. 즉 우리가 수년을 공부해서 정말 원어민 수준의 프랑스어 구사 능력을 갖춘다고 하더라도, 언어만 놓고 보면 그제야 저 8천만 명과 같은 출발선상에 서게 된 것이다. 투자 대비 수익이 너무 낮다. 기타 언어도 그렇다. 현지 언어능력이 원어민 수준이고 현지 정부/기관/현장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원한다면 해당 기관 경력이 있는 현지 인력을 채용하는 게 더 빠르고, 효율적이고, 때로는 저렴하다. 따라서 그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전문성을 기르는 것이 경쟁하기엔 더욱 나은 방법이다.

INGO건 국제기구건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 사람을 채용하는 것은 그 사람의 언어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자리에 맞는 전문성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가장 우선순위라면 국제기구에는 영어권, 불어권 (이하 생략) 국가 출신만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한국인은 당연하고 동남아, 동유럽 등 UN 공식 언어를 쓰지 않는 국가 출신들도 각자의 전문성과 경력을 가지고 여러 기구에서 활동한다. 오늘 막 그 존재를 알게 된, 그리고 오늘부로 내 꿈의 직장이 된 세계 와인 기구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Vine and Wine, OIV)도 이름만 들어보면 프랑스 사람들만 잔뜩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아르헨티나, 그리스, 중국 등 세계 각국의 와인산업 전문가들이 더 많이 근무하고 있다.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고 프랑스 부르고뉴 중심의 한 고성을 사무실로 쓰는 기구지만 (다시 한번, 내 꿈의 직장이다) 이 세 언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 현지인보다 더 많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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