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4/10)은 22대 총선이 열리는 날이다. 사전투표율은 30%를 웃도는 역대 최고를 기록했고, 최종 투표율도 역대 최고를 바라볼 정도로 참여의 열기가 뜨겁다. 나도 사전투표로써 주권을 행사했다. 난 혜화에 살고 있는데 평소에 놀러 오는 사람이 많은 동네라 그런지 관내 사전투표는 줄을 서지 않고 바로 투표를 할 수 있었지만, 관외 투표는 최소 30분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원이 훨씬 더 많았다. 그중 대부분은 젊은 층이었는데 놀러 와서 한 표를 행사하는 젊은 층이 많은 모습에 왠지 모를 든든함과 희망과 뭉클함을 느꼈다.

파견 생활을 하던 때에도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당시엔 20대 국회의원 선거였다. 그때 내가 살던 곳은 베트남의 꽝찌성이라는 곳이었는데, 경기도 다낭시에서 기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동네다. 지금은 다낭에 재외투표소가 있지만 당시에는 호치민과 하노이, 두 군데에만 투표소가 열렸다. 그래서 기차를 13시간 동안 타고 하노이까지 가서 주권을 행사했다. 이런 썰을 비개발협력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적잖이 놀라지만, 기차를 갈아타지 않고 한 번에 투표소까지 가는 루트가 있다는 것은 파견 생활에서는 꽤나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휴가를 내고 비행기, 기차, 버스를 두 번, 세 번씩 갈아타고 어렵게 한 표를 행사한 썰, 불우하게도 투표장까지 가는 중에 교통편에 문제가 생겨 도중에 여정을 포기한 썰도 많다. 누가 그 흔한 교통비를 주는 것도 아니지만. 왜 그토록 투표에 진심인걸까? 저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나 같은 경우는 현장에서 ‘한국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아무래도 해외에 있고, 첫 파견 생활이다 보니 한국 국내 상황을 놓치거나 해석하지 못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한국과 떨어진 채 도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보다 의도적으로 한국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고, 누군가에게 나의 한 표를 주겠다는 의사결정부터 투표장에 도착하여 투표하고 누가 될지, 어느 당이 이길지 등의 정치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는 전 과정을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 덜 도태되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 돌아보면 그저 느낌적인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 당시에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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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총선 당시 ‘이대로 도태될 수 없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극복하려 발버둥 치던 한 청년은 마이크 앞에 앉아 수천, 수만 명의 시민들과 매주 정치 시사 이야기를 나누는 업을 병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원하던 그린뉴딜, 기본소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제대로 못 한 21대 국회여서 아쉬움이 매우 크지만, 한 편으로는 자연스럽게 여의도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흐름을 훑어볼 수 있는 학습의 시간이었다. 기후, 국제개발협력 관련 다양한 정책을 뜯어보고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궁금했던 정치인과 대화하며 그들의 삶도 들여다보고,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청년 정치 꿈나무들과 미래를 논하고, 정당의 작은 역할을 맡아 정당 내부도 들여다보며 다양하게 실험하고 탐구할 수 있어서 재밌었다. 마이크 앞에 서는 것도 꽤나 자연스러워졌고. 무엇보다 방송 덕분에 내가 일하는 분야의 정책, 쟁점을 시민들에게 던지고 반응을 확인하며 직접 소통하고 여론을 파악할 수 있어 유익하고 좋았다. 특히나 빈곤 포르노 이슈가 터지기 몇 주 전에 마침 방송에서 빈곤 포르노를 주제로 다뤘었는데, 마침 큰 사건이 터지며 우리 방송을 보는 분들이 이 사건에 더욱 주목했고, 덕분에 공사모가 연 서명운동에 2만여 명이 서명하는 흐름에 기여한 것도 큰 배움이자 보람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늘 아쉬운 것은 ‘국회에 정치인 하나 없는' 국제개발협력 분야의 위치다. 웬만한 부처보다 큰 예산이 배정됨에도 대표성과 전문성 있는 정치인 하나 없는, 주류 사회가 빈곤 포르노를 하고 난리를 쳐도 이에 대응하는 정치인 하나 없는, 될 가능성이 0에 수렴하던 엑스포를 유치하겠다고 현장이 어떻게 되건 말건 ODA를 공수표처럼 남발해도 이를 바로잡을 정치인 하나 없는, 갑자기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재건하겠다며 책무성도 투명성도 없이 예산을 고무줄마냥 늘려도 이를 국제개발협력 관점에서 지적하고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문제제기 하는 정치인 하나 없는 주류사회 속 국제개발협력의 무존재감에 여러번 참담함을 느꼈다. 시민의 관심이 없는 분야이니 정치권에서는 굳이 이 분야의 인사를 영입하고 자리를 내어줄 필요가 없고, ‘왜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가 ‘국익' 외엔 없으니 ‘좋은 일'이라는 것 외에 딱히 시민들에게 자랑하고 증명할 성과도 없어서 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국제기구 이력이 있으면 그럴싸해 보이는 정도랄까. 이는 늘 기후환경 분야와 크게 대조된다. 시민의 관심이 크고, 부실하지만 어쨌든 온실가스 감축 목표 같은 공통의 지향점이 있으며, 문제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새로운 세상을 제시하려는 교수/변호사/연구자/학생/일반시민 등 운동성을 갖춘 다양한 계층의 연대가 있음에 이른바 ‘기후정치세력화’가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정치인들도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기후공약을 걸기 시작했다. 분야가 해결하려는 문제와 목표가 있고, 이를 요구하고 직접 실행하고 행동하는 시민이 많으니 그간 환경운동가들의 편향적 선동 정도로 여겨졌던 기후 문제가 주류사회의 기본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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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총선에는 국제개발협력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나오면 좋겠다. 이를 위해 국제개발협력에 관심 있는 시민이 많아지면 좋겠다. 후원자만 만드는 것이 아닌 시민을 만나는 운동성이 국제개발협력에 자리하면 좋겠다. 그래서 망망대해를 정처 없이 떠도는, 돈은 많이 싣고 있는 이 배가 이런저런 해적들에게 뜯기며 ‘도태되지 않고' 지구촌 모두의 더 나은 삶이라는 멀고 먼 목적지에 다다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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