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다 보면 괜히 의미 없는 웹페이지나 뒤적거리고 딴짓하는 날도 있는가 하면, 벅찰 정도로 일이 몰리는 날도 있다. 업무가 없을 땐 ‘너무 심심해, 일 좀 있으면 좋겠다.’라고 배부른 생각을 하다가도 일이 조금만 많아지면 과거의 내가 원망스럽다. 자아실현이고 뭐고 그냥 불로소득으로 매월 돈 받으면서 세월아 네월아 놀고 싶어진다. 근데 지금은 일이 조금 많은 게 아니라 아주 많다.

얼마나 일이 많냐면 도대체 뭘 먼저 해야 일이 풀릴지 감이 하나도 잡히질 않아 컴퓨터 앞에서 30분 정도 멍하니 까매진 화면만 보고 있을 정도로 많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마감도 가까우니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정작 진도는 하나도 안 나간다. 게다가 회의에 워크숍은 왜 이리 또 많은지. 회의 서너 개 다녀오면 아침 시간은 다 끝나있고, 일 조금 하다 보면 퇴근 시간인데 일은 남아있으니 야근하거나 집에 일을 들고 가서 계속한다. 이러다 정신 차리면 밤 열 시에서 열한 시. 눈만 붙이고 7시 반까지 출근하는 이런 생활을 한 달 조금 넘게 하고 있다.

이 일이 하루 이틀의 야근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란 걸 깨닫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은 아마 다들 한 번씩은 해 봤을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오늘만 버티면 내일은 논다…등 긍정의 마음을 가져보기도 하지만 사실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게 현실. 이렇게 일이 겹친 상황과 업무를 던져주는 보스, 급하게 뭘 해결해 달라고 하는 동료에게 원망을 털어놓고 그냥 아무도 없는 데로 행복을 찾아 도망이나 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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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한다. 내 업보다. 한 달 넘게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서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둔 일과, 그 뒤로 바로 떠난 일주일의 휴가가 합쳐져서 일이 밀려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하는 일을 해줄 수 있는 다른 팀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팀원 중 하나는 다른 나라로 3개월 장기 출장을 가서 그쪽 일을 전담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또 다른 나라에서 개최되는 큰 행사를 준비하느라 일을 도와줄 여지가 없었다. 남은 건 나 하나뿐이니 새로 생기는 업무가 전부 나한테 오고 이게 밀린 일과 합쳐져 지금의 야근 지옥을 만들어 낸 것이다.

오는 업무도 참 다양하다. 언급하기 조심스러운 것도 있어 두루뭉술하게 표현하자면 인력 교육 커리큘럼과 매뉴얼 작성부터 연수사업 지원, 프로젝트 관리, 인사, 국가 협력 전략 작성, 프로그램 예산 설정 평가, 정책 분석 및 제언, 내부 인력 역량 강화까지 온갖 업무가 왔다가 지나간다. 나름 이쪽 필드 전문가랍시고 채용된 건데 하는 일은 온갖 분야를 넘나드니 채용에 쓰는 직무기술서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개발 협력을 하면서 진로를 결정할 때 가장 많이 접하는 - 그리고 항상 뜨거운 논쟁이 있는 - 주제가 아마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 중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가…하는 고민일 것이다. 아예 예술이나 운동같이 어렸을 때부터 명확한 분야와 진로를 가진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잘 안 하겠지만 (내가 이쪽에 아예 무지하기에 나오는 선입견이다. 당연히 진로에 대한 그들의 고민이 있을 것이다) 이 업계에서 일하는 다수처럼 대학에 들어가 전공과 처음 만나고 이후 취직하며 진로를 택한 사람들은 대부분 한번은, 특히 업무를 시작한 초기에, 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보통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그중 하나만을 답으로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넓은 길을 가건 좁은 길을 가건 일단 몸은 하나이니 둘 중 하나를 무조건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야를 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코이카 중점분야(교육, 보건의료, 공공행정, 농림수산, 기술환경/에너지)와 범 분야 (환경, 성평등, 인권/평화) 중 하나를 골라야 할 것 같고 나중에 전문가 등록 신청을 할 때도 분야 2개만 인정해 준다고 하니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분야를 골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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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요즘 들어 이런 선택이 꼭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일이 많아지면 잡생각이 늘어난다고, 가뜩이나 예상 못 했던  일을 하다 보니 이게 정말 내 일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나름의 질문을 또 하게 된다. 과연 전문성이 부재한 ‘제너럴리스트’, 내 세부 분야만 아는 ‘스페셜리스트’가 존재할까? 나름 섹터 전문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의문이다) 나는 제너럴리스트인가 스페셜리스트인가?

우리 회사 국장님을 예시로 들어보자. 회사에서 이 정도 위치에 올라간다면 본인의 업무는 하나의 사업을 맡아서 운영한다기보단 밑 직원들의 업무를 관리하고 역량을 파악해 더 능률을 올리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각각의 사업의 모든 부분을 파악하지는 못하고, 사업 담당자만큼의 전문성을 가지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국장님이 전문성이 없는가? 그럴 리가. 특정 분야에 전문성이 부족한 사람은 그 자리로 갈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최소 하나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고 성과를 보여주어야 관리자로 일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아,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다. 우린 이런 걸 낙하산이라고 부르고.

완전히 반대의 사례로 내 대학원 지도교수님이 있다. 대학의 교수쯤 되려면 본인이 맡은 분야의 최첨단 지식과 트렌드를 알고 또 그에 대해 본인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데이터와 함께 ‘꾸준히’ 주장할 수 있는 (즉, 연구를 해서 논문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스페셜리스트 중의 스페셜리스트라고 봐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분이 정말 본인 분야 학문밖에 모를까? 당연히 아니다. 하다못해 옆방 교수님이랑 협력하려고 해도 그쪽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고, 정부 연구과제를 따오려면 정부 입찰 프로세스의 이해, 문서 작성법, 하다못해 프레젠테이션을 발표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아무리 스페셜리스트라고 하더라도 정말 본인의 분야만 알다 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결국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는 공존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 선택지라기보단 하나의 그래프에서 어느 축으로 조금 더 내 전문성이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상대적 척도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x축을 업무의 다양성, y축을 업무의 전문성으로 보자면 그 삼각형의 각도, 넓이, 높이에 따라 ‘비교적’ 더 범용적인 업무를 하는지 전문적인 업무를 하는지가 나뉘고, 일의 경험을 계속 쌓아가면서 삼각형의 절대적인 넓이가 커진다. 예로 범위가 넓은 둔각삼각형은 (제너럴리스트) 높이가 낮은 예각삼각형보다 (스페셜리스트) 전문성이 더 높은데, 이러한 상황에서 제너럴/스페셜을 따지는 의미가 있을까?

또 일을 하다 보면 개발협력쪽 업무가 특히 스페셜리스트, 제네럴리스트를 넘어 르네상스적 인간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현장에서 특히 이런데, 정말 나가 있는 활동가 말고는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경우이다. 내가 인력 교육 전문가로 현장에 투입되더라도 사람이 없으면 회계도 하고 사업 관리도 하게 되고, 반대로 현장 관리자로 파견되더라도 전문가가 없다면 논문에 국제기구 가이드라인이라도 뒤져서 어떻게든 사업 틀을 만들고 사업을 끌고 가게 된다. 또 어찌어찌 쳐내다 보면 뭔가 잘하는 듯  싶으니 일이 하나둘씩 늘어나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뭔가 내 계약서에 명시된 거 외의 일이 잔뜩 쌓여있다. 강제로 만능 인력이 됨을 요구받는다. 월급도 오르면 좋으련만 그거는 쏙 빠지고.

가끔 업무라는 게 내 의지대로 오가는 게 아님을 새삼 느끼는 시기가 생기는데, 요즘이 딱 그렇다. 계획으로는 월요일에 A를 처리하고 화요일엔 B를 처리하자고 적어두지만, 현실에선 ABCDEFG가 목요일 퇴근 직전에 ‘다음 주 월요일까지 부탁해요!’라는 한마디와 함께 폭탄처럼 떨어지는 게 우리네 삶이다. 이게 또 내 전문 분야면 어떻게든 아는 거 다 동원해서 처리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어쩔 수 없지 뭐. 논문에 보고서에 업계 집단지성 (공사모라던가, 공사모라던가, 공사모라던가)을 이용해 일을 해낸다.

이번 에세이를 마무리 짓는 지금은 토요일 저녁. 첫 줄부터 지금 쓰기까지 약 3주가 걸렸다. 집 앞 공원에서는 수제 맥주 축제가 열리고 있고 친구들은 왜 안 나오냐며 연락하지만 나는 화면 하나에선 에세이를 쓰면서 다른 하나에선 논문을 읽고, 다른 하나로는 강의를 듣고 있다. 토요일! 밤에! 나도 놀 줄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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