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OICA 시민사회협력사업 공모 마감을 앞두고, 몇 건의 제안서 컨설팅을 요청받았다. 외부 컨설턴트로서 받아보는 것은 파일 한 개지만, 이 문서가 나오기까지 얼마나들 고생을 했을까. 제안서를 질리도록 써 본 사람으로서, 보자마자 문서 뒤 노고의 흔적이 느껴졌다.
프리랜서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제안서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시기가 대략 정해져 있는 기관 공모와 달리 입찰 공고는 일년 내내 나오기 때문에 컨설팅 회사는 연중 제안서 대기모드다.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차근차근 준비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떨 때는 (사실 꽤 많은 경우) 갑자기 위에서 떨어진 의사결정에 허둥지둥 기계처럼 제안서를 뽑아내기도 한다. 여기에 팀장급이라면, 팀원들을 모아놓고 곧 제안 작업 들어간다는 얘기를 하는 것도 고행이다. 윗분들의 압박과 팀원들의 어두운 표정 속 원망스러운 눈빛 사이에서 그야말로 팀장은 새우 등 터지듯 터져나간다.
제안서를 써내는 과정도 참 골치가 아프다. 매일 조달 사이트에 접속해서 공고가 언제 올라오려나 모니터링을 하지만,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툭 하고 올라온 공고에 뒷통수가 얼얼해지기도 하고, 긴급이라는 두 글자가 붙어있으면 보름 안에 제안서를 끝내야 하기 때문에 편두통이 심하게 찾아온다. 챙겨야 할 서류 목록은 왜 매번 새롭게 낯설고, 예산은 왜 언제나 부족한지. 돈을 들고 있는 기관의 의도도 읽어야 하고, 심사위원의 마음도 사로잡아야 하고, 동시에 우리 기관 어르신들의 입장도 녹여내는 일은 보통이 아니다. 거기에 역량과 열정을 모두 갖춘 전문가를 섭외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며, 아무리 꼼꼼하게 들여다봐도 구멍은 계속 있고, 마감일까지 이슈가 수도 없이 터진다.

제안서는 결과로 평가받는다. 밤을 새서 열심히 썼어도, 결과가 나쁘면 고생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신박한 아이디어나 낮은 가격이 수주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될놈될이라는 말처럼, 흔하디 흔해보이는 내용에 높은 가격을 써내도, 될 사업은 된다. 오랜 기간 밑작업을 해왔어도 갑자기 등장한 경쟁업체에 사업을 빼앗길 때도 있고, 점수를 까보니 정말 한 끝 차이로 떨어져 머리를 쥐어뜯는 날도 있다. 누군가의 돈으로 프로젝트 하나 한다는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싶다.
하지만 프리랜서가 되어 나쁜 점 중 하나도 제안서를 쓸 일이 없다는 거다. (응?) 그렇다! 이 지점에서 갑자기 거리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날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에세이의 반전은 사실 내가 제안서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무슨 변태(?) 같은 소리냐 진절머리를 치겠지만, 제안 작업은 내가 선호하는 업무들의 총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총 작업 기간이 짧고 결과물이 확실하다. 길어봐야 몇 개월안에 끝나고, 낙찰이냐 아니냐 외의 다른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단순한 승패의 싸움이다. 그런데 이렇게 단기간에 결과를 내기 위해 해야하는 일들은 얼마나 다이나믹하고 복합적이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지.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발주기관의 요구사항을 해석해야 하고, 현장의 문제를 고민하며 경쟁력있고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엮으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사람의 고민과 노력이 필요한 팀워크의 정수다. 게다가 잘 보이게 그럴 듯 하게 포장까지 해야하는, 그야말로 도파민 끝판왕의 작업이다. 여기에 운 좋게 결과까지 좋아, 개찰 결과 1순위에 올라있는 회사 이름을 본다? 와우, 그간의 고생을 단숨에 보상 받는 느낌과 안도 속 승리감과 짜릿함은 느껴본 사람만 안다.

물론 이정도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려면, 겉핥기 식, 마구잡이식 제안이 아니라 팀원들과 진심어린 고민을 이어가고 끝장토론을 해가며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이상적인 제안 과정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런 제안서가 날마다 찾아오진 않는다. 또 때에 따라 수주가 확정되더라도, 앞으로 이 사업을 또 어떻게 해나가야 하나 싶은 걱정이 기쁨을 금새 압도하기도 한다. 고생해서 겨우 딴 사업이 엉망진창으로 흘러갈 땐, 그때 차라리 수주하지 말걸 하는 덧없는 후회를 하기도 하고, 관리하는 사업 수가 늘어나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압박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프리랜서가 되어 혼자 일하는 지금, 가끔은 팀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화이트보드를 난장판으로 만들며 제안서를 썼던 때가 그립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단기간에 집중해서 현장에 대해 고민하고 차별성 있는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과정, 하나의 목표를 두고 동료들과 치열하게 고민해서 결과물을 내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도 조직도 한 단계 더 단단하게 성장한다는 느낌을 그리워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다음주부터 함께 제안서 쓰실래요,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면 일단 뒷걸음질부터 칠 것같지만.
Ps. 제안 작업으로 받는 고통을 위로하는 줄 알았더니, 배부른 소리를 하는 에세이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구독자 여러분에게 심심한 사과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