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이야기다. 이 업계 있던 지난 십몇 년간 한국을 들어간 횟수보다 2024년 한 해 한국을 들락날락한 횟수가 더 많은 것 같지만 연말이니 일단 또 간다. 필리핀에서 한국까지 네시간 비행 후 짐을 찾아서 공항을 나가려는데 어? 가방 손잡이가 올라오지 않는다. 어디 걸려서 안 나오나 싶어 꽤 힘을 줘서 억지로 잡아당겨도 도저히 뽑힐 기색이 없다. 차도 기다리겠다, 가방도 비어서 가볍겠다, 일단 나와서 확인하자는 생각으로 억지로 끌고 집까지 가서 살펴보는데 이야, 가방 중간을 지지해 주는 스테인리스 지지대가 완전히 휘어있더라. 손잡이는 그 안에 있으니 당연히 안 뽑히고. 힘으로 다시 펴보려고 해도 또 애매하게 비틀어지기만 하니 도저히 수습이 안 된다.

(예전 에세이에 사용한 사진이지만… 이 가방이다)

(예전 에세이에 사용한 사진이지만… 이 가방이다)

아, 이제 얘는 끝이구나. 15년 전에 10만 원도 안 되는 값에 사서 지구 몇 바퀴를 같이 돌았는데. 남미랑 남극 빼곤 모든 대륙을 다 찍었는데. 온데사방 찢어져 틀을 잡아주던 철사가 빠져나오고 바퀴가 고장 나도 어찌어찌 기워가며 계속 썼는데 이제 정말 보내줘야 할 때가 왔구나 싶었다. 그래, 새해 새 술 새 부대에 담아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번엔 30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굴릴 수 있는 튼튼한 가방으로 사야겠다.

두번째. 이건 연초, 글을 쓰는 지금 갓 3일 된 따끈따끈한 이야기다. 집 근처에서 조금 늦은 저녁을 먹고 맥주 한잔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워낙 안전한 지역이고 또 아주 늦은 밤도 아니라 정말 완벽하게 긴장을 풀고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데 스쿠터 두 대가 매우 빠른 속도로 나타나더니 내 옆에 멈춰 섰다. 얘네가 이게 뭔가…했는데 갑자기 한 명이 내리더니 나한테 총구를 들이밀더라. 사람은 기억이 안 나는데 총은 기억난다. 은색의 베레타 92.

(이런 느낌. 웃고있진 않았다)

(이런 느낌. 웃고있진 않았다)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멍해져서 반응을 못 하고 있는데 다른 스쿠터에서도 한 명이 재빠르게 내리더니 내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확 잡아당겼다. 무의식적으로 뺏기지 않으려고 힘을 줘 당기다가 아, 이러다가 나 크게 다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손을 확 놔버렸다. 강도들은 핸드폰을 채어가더니 뒤돌아보지 않고 바로 다시 스쿠터에 올라타 왔던길로 돌아갔다. 과속해서. 역주행으로.

하필 집 바로 앞에서 강도를 당한지라 - 내가 조금만 더 빨랐어도 안전했을 거다. - 아파트 경비들한테 도난을 당했다고 알리고 집으로 올라왔다. 핸드폰에 연결되어 있던 여러 계정, 카드들을 정지시키면서 그나마 핸드폰 하나로 끝난 게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 시계도 있었지만 뺏기지 않았고 무엇보다 다친 데 하나 없이 멀쩡했으니. 핸드폰이야 다시 사면 되는 거고 (물론 매우 아깝긴 하다. 이제 산 지 5개월밖에 안된, 할부가 막 끝난 핸드폰이었는데).

급한 정리를 끝내고 주변 사람들과 회사 안전담당자에게 상황을 알리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아, 그래, 총기강도가 사실 흔한 일은 아니지. 나와서 사는 나야 2년에 한 번꼴로 집에 도둑이 들거나 소매치기를 당해 나름 무뎌졌다고 하지만 한국사는 사람들에게 강도 - 특히 총기로! - 는 인생에 한 번 일어날 법 한 일이니 놀라고 걱정하는 게 당연하고, 그렇게 걱정해 준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난 사실 에세이 소재 하나 벌었다는 생각밖에 못 했는데.

이래저래 의미 있는 것들을 버리게 된 연말·연초였다. 매년 말이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데, 올해는 친구들과 놀면서 보내서인지 다른 의미의 송구영신을 하게 된 것 같다. 얼마나 재밌게 새로 들어오려고 삶에서 나름 큰 의미를 차지하던 것들이 이렇게 나가버렸을까. 생각해 보면, 더 버리고 싶은 것도 있는데. 이런저런 미련, 걱정, 게으름 등은 그대로인데 애먼 물건들만 버렸으니 아주 아쉽다. 그래도 아직은 연초니 정말 비워야 할 것들을 비우고 더 좋은 것이 채워질 공간을 마련해야겠다. 더 많은 운동이라던가, 다른 나라를 향한 도전이라던가, 대학원을 다시 시작할 용기와 열정이라던가 (이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또 한해의 첫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2024년 공적인사적모임과 김칩을 통해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활동을 했다. 해외 있으면서도 한국의 개발 협력 업계 사람들과 연을 이어가고 같이 작당하며 더 나은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한 활동들 하나하나가 너무 귀하고 소중했다. 다시 한번 우리가 사람을 위해 일한다는 걸 자각하게 된 활동이었고, 타성에 젖어 일할 뻔하다가도 다시 한번 열정을 찾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올해 더 좋고 새로운 것을 채우고 싶다고 했는데 공사모 활동이 아마 그중 꽤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구독자 여러분의 한 해는 어떠셨나요? 많은 것을 비우신 한 해였나요. 아니면 채우신 한 해였나요? 결국 우리는 흘려보내야 할 것들을 비워내고, 새로운 것들로 가득 채우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무엇보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단단하고 행복하게 해줌을 잊지 않으며 또 한 해를 걸어가 봅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