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벌써 2025년이 끝났어? 진짜로? 한 것도 없는데?

매년 이맘때쯤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지만, 올해는 유독 더 실감이 안 난다. 달력을 다시 넘겨을 끝까지 내려보고, 사진첩도 열어봤다. 그래도 “아, 올해 이건 좀 했다” 싶은 장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 이건 좀…” 하는 장면은 좀 많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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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만 쉬었더니 한 해가 갔다고 하기엔 숨도 그렇게 열심히 쉰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진짜 아무것도 안 했다고 말하기엔 매일이 너무 바빴다. 회의는 늘 있었고, 문서는 항상 급했고, 출장 가방은 1년 내내 현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아 있는 건 성취감보다 피로다.

2025년은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국제개발협력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꽤 불안한 해였다. 세상은 계속 시끄러웠고, 뉴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위기를 던져줬다. 전쟁은 끝날 기미가 없었고, 다자협력은 사라져가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회의에서 오가는 단어들도 바뀌었다. 예전엔 확장(scale-up)과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했다면, 올해는 우선순위 재조정, 재원 불확실성, 리스크 관리 같은 말이 더 자주 튀어나왔다. 희망을 말하기 전에, 일단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말이 먼저 나오는 한 해였다. 아니 희망이 사라졌다기 보다는, 희망을 말하는 방식이 훨씬 조심스러워졌다고 해야할까.

국제기구 안에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안에 있으니 위기가 더 잘 보였다. 예산은 줄어들 가능성을 전제로 짜야 했고(실제로도 많이 줄었고), 이미 합의된 계획과 인력도 축소된 예산에 맞춰 몇 번이나 검토, 수정 됐다. 여러 나라들은 국제기구를 탈퇴, 혹은 기여금을 줄였고 이는 당장 내게도 세 번의 보직변경과 부서 이동, 그리고 비교적 안정적인 계약에서 당장 내년을 보장하기도 힘든 계약 변경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일했지만 그것이 항상 결과로 이어질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가끔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같은 자리를 조금 더 정교하게 – 하지만 무의미하게 - 맴돌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는 계속됐고, 보고서는 계속 써야 했고, “이게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이라는 문장은 문서와 회의 여기저기에 반복해서, 질릴 정도로 등장했다.

이런 문장들이 쌓일수록 마음은 조금씩 닳아갔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다고 위로가 되지도 않는 말이 너무 많았다. 국제정세가 이러니 어쩔 수 없다, 조직이 이러니 시간이 걸린다, 지금은 버티는 게 중요하다 – 아니 중요하지. 모르는거 아니고 모두 맞는 말이지만, 그 말들이 하루를 버티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냥 하루를 설명해 줄 뿐이었다.

꽤 지치는 한 해였다. 한 나라에 내 기준으로는 너무 오래 머물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예전만큼 반갑지 않았다. 네트워킹이라는 이름의 커피 약속이 귀찮아졌고(원래부터 귀찮긴 했다), “한 번 봐요”라거나 “밥한번 먹자” 라는 말이 점점 더 자동응답처럼 튀어나왔다. 완전한 내향형으로서, 예전만큼 사람을 만나는데 에너지를 끌어올리기가 힘들어졌다. 일도 마찬가지. 일이 싫어진 건 아닌데, 일에 나를 설득할 에너지가 줄어든 느낌이었다. 내가 하고있는 이 일이 정말 필요한가 – 당연하지 - 라는 질문보다는, 이 일을 이렇게 하는 게 맞는가, 라는 질문을 더 자주 하게 된 해였다. 답은 잘 모르겠고, 질문만 늘어났다.

그렇다고 완전히 아무것도 없던 해는 아니었다. 작은 승리가, 그래서 더 잘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준비한 기획안에 담당자가 “이거 덕분에 회의가 해결됐다”고 말해줬던 날, 밤늦게까지 싸우듯 조율하던 사업이 결국 한번의 사과로 합의로 마무리됐던 순간, 진척이 없던 사업을 집행률 10% 대에서 90% 넘게 끌어올린 일,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이 일을 진지하게 붙잡고 있다는 걸 확인했을 때. 개발협력이라는 게 원래 그런가 싶다. 박수 받을 일은 거의 없고, 욕먹을 일은 많고, 성과는 늘 애매한. 그래도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하고, 이상하게도 나는 아직 그 ‘누군가’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왜일까.

2025년을 돌아보면, 이 해는 뭔가를 크게 이뤄낸 해라기 보다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쓴 해였지 싶다. 풍랑 속에서 가야하는 방향을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완전히 손을 놓지도 않았다. 기대치를 낮추고, 속도를 줄이고, 대신 버티는 법을 연습한 시간들이었다. 그게 성장인지, 그냥 나이를 먹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둘 다일듯 싶은데.

그리고 이렇게 한 해를 정리하는 지금, 나는 새해를 꽤…어… 상징적인(외교적 수사다) 방식으로 시작하고 있다. 2026년 첫날 새벽, 여기는 공항. 여행이나 출장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마중하기 위해서다. 캐리어도 없고, 여권도 없다. 대신 잠이 덜 깬 얼굴과 커피 한 잔이 전부다. 해가 뜨기도 전인데 공항은 생각보다 분주하고, 나는 도착 게이트 앞에서 전광판을 멍하니 보고 있다. 잠은 거의 못 잤고, 머리는 아직 2025년에 남아 있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