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말, 르완다 출장. 그 뒤로 개발도상국 현장엔 가지 않았다. 미국이나 사이판 같은 곳은 여행으로 갔지만, 붉은 흙이 있는 곳, 새로운 음식과 향이 있는 곳, 멋쩍은 웃음이 있는 곳,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 현장들엔 가지 않았다. 13년 커리어에서 이런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코로나 때가 있긴 했다. 한동안 현장에 못 갔던.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선택이다. 당분간은 서울에 있기로 한 선택.

나는 사실 현장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환경, 사람, 언어. 공항에 내려서 처음 맡는 그 나라의 공기. 어두침침한 호텔 방. 처음 보는 음식들. 물갈이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는 나는 그야말로 현장 체질이라고 생각해왔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은 내 출장 인생의 8할을 차지한다. 서아프리카의 먼지와 동아프리카의 붉은 흙. 푸릇한 나무들 사이로 하염없이 걷는, 나와는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제2의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현장에서 당사자를 만날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란 게 있다. 보건소 간호사와 나누는 대화. 농민 조합 회의에 앉아 있을 때의 긴장감. 어린 아이들의 순박한 미소 앞에 서는 순간. 그게 좋았다.

(2025년 10월 르완다에서)

(2025년 10월 르완다에서)

그런데 6개월 동안, 서울에서만 일했다. 처음엔 어색했다.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집에서 줌을 켰다. 화면 너머는 네팔이었다. 성과관리 워크숍. 준비를 많이 했다. PPT, 워크시트, 사례. 유머와 아이스브레이킹도 섞어서 오프닝을 만들었다. 화면 너머 참가자들과 눈을 마주치며 시작하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워크숍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제 이름은…" [연결 중…] "죄송해요, 다시 시작할게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다시 한 번, 안녕하세요…"

세 번쯤 반복하다 보니 얼굴이 붉어졌다. '더 하고 싶지 않아.' 기껏 준비한 유머는 타이밍을 놓쳤고, 아이스브레이킹은 이미 어색했다. 결국 네팔 현장에서는 카메라를 껐다. 인터넷이 불안정해서. "괜찮아요, 컨설턴트님 얼굴은 잘 보여요. 저희는 목소리만으로 참여할게요." 현장의 그들은 친절하게 말했지만,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화면을 보며 떠드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거기 가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서울에 있어야 한다.

(어느 때보다 멀게 느껴지던 화면 너머의 현장)

(어느 때보다 멀게 느껴지던 화면 너머의 현장)

오프라인 강의를 하러 나가고 국내 출장으로 회의를 다녔다. 공사모 첫 정기총회도 열고 조합원 모집도 준비했다. 국무조정실과의 간담회도 네 번이나 진행했다. 회의실 테이블을 닦고 다과를 산다. 의제를 정리하고 핑키와 매주 정기회의를 한다. 현장 일 같지는 않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자주 이런 말을 듣는다. "공사모 활동 잘 보고 있어요." "유튜브에서 공론장 숏츠 봤어요." "기사 잘 읽었어요." 국무조정실 본부장님과 현장의 주니어, 컨설턴트들이 만나는 자리를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본다. 정책과 현장을 연결하는 일. 목소리를 모으는 일. 대화의 장을 만드는 일. 강의실도, 회의실도, 줌 화면도, 이것도 현장이었다.

(강의실도 현장이다)

(강의실도 현장이다)

한국에만 있는 요즘도 좋다. 가족과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 매일 배달음식을 시켜먹는다. 늦은 밤 산책을 한다. 편의점을 간다. 짝꿍과 저녁을 먹는다. 주말에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친구들을 만난다. '이것도 나쁘지 않네.' 일 년에 40번 넘게 비행기를 타던 해에는 누리지 못했던 일상이다. 옷장 속에는 여전히 출장용 파우치가 있다. 현지 지폐를 담을 지갑, 국가별 말라리아약 케이스. 가벼운 드라이기, 라면 포트, 챙이 넓은 모자. 요즘 서울에서 지금 쓰는 가방 속엔 그런 물품들은 없다. 노트북. 충전기. 텀블러. 이어폰. 강의 자료. 서울을 다니는 가방. 언제쯤 다시 저 출장용 파우치를 쓰려나 싶다.

(짝꿍과 보내는 소중한 서울의 시간)

(짝꿍과 보내는 소중한 서울의 시간)

6개월 동안 서울의 삶에서 배운 것. 현장은 아프리카에만 있지 않다. 개발협력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사람과 사람이 만나 대화하고,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조금씩 나아간다면. 줌 화면도 현장이다. 강의실도 현장이다. 성수동 회의실도 현장이다.

다음 출장은 언제일까.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다. 여러 이유가 있다. 하지만 급하지 않다. 지금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동아프리카의 붉은 흙이 그립다. 하지만 배달음식도 그리울 거다. 맨발의 농민과 나누던 대화가 그립다. 하지만 짝꿍과 보내는 시간도 소중하다. 모기장이 드리워진 공주님st의 침대도 그립다. 하지만 우리 집 침대가 솔직히 최고다.

다르다. 분명 다르다. 하지만 동시에 같다. 개발협력은 어디서나 일어난다.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지금 여기도 현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