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에게도 기세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기세는 큰소리를 치는 태도도, 무례하게 맞서는 태도도 아니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서부터는 부당한지 아는 힘이다. 부탁과 지시 사이에서 나를 잃지 않는 힘이다.

나는 되돌아보면 착한아이증후군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친구들이, 선생님이 무언가를 부탁하면 웬만하면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절하는 순간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단체생활을 할 때도 내 기준보다 타인의 기준을 먼저 살폈다. 누군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고, 적당히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그 버릇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더 선명해졌다. 특히 프로젝트 단위로 일할 때는 여러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야 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중심을 잡기보다, 요청을 먼저 받아 적는 사람이었다. 내가 힘든지, 이 일이 맞는지, 회사의 방침과 어긋나지는 않는지 따지기 전에 “일단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인턴으로 근무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나는 새로운 사업의 제안서를 작성했고 운 좋게 그 사업을 수주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사업 수행까지 내가 맡게 된 것이다.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비상근 PM님과 주니어였던 나뿐이었다. PM님은 사무실에 계시지 않아 전화와 카톡으로만 소통했고, 발주처 요청이 오면 나는 초안을 만들고 보고를 올렸다. 계약부터 예산, 보고, 일정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그때는 그저 지시받은 일을 잘 해내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믿었다.

그러다 예산 문제로 중간관리자에게 크게 혼난 일이 있었다. 내가 임의로 판단한 일도 아니었다. PM님의 지시에 따라 진행한 일이었고, 회사 내부 방침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자 PM님은 책임을 나누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잘 알아보지 않고 진행한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나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누군가의 직급이 높다고 해서 그 판단까지 모두 대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니어일수록 더더욱 근거를 남기고, 기준을 확인하고, 내 판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 이후로 나는 일하는 방식을 바꿨다. 구두로 받은 요청은 회의록이나 메시지로 다시 정리했다. 중요한 답변은 메일로 남겼다. 보고할 때도 “회사 방침상 가능한 범위”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설명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자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이전에는 내가 거절하지 못해 불편했던 줄 알았는데, 사실은 상대의 무리한 요구를 내가 너무 성실하게 받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알았다. 기세는 상대를 이기는 태도가 아니었다.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세우는 기준이었다.

기세가 필요했던 또 다른 순간은 업무 분배였다. 회사에서 글로벌 연수사업을 처음 맡았을 때였다. 이전에 아무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 매뉴얼도, 예시도 없었다. 나는 외국어 전공자도 아니었지만 15명의 불어권 연수생을 2주 동안 혼자 인솔했다. 수업과 현장학습을 챙기고, 이동을 통제하고, 식사를 조율하고, 분실물을 찾고, 밤늦게까지 쇼핑 요청을 도왔다. 주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한국에 처음 온 연수생들이 나쁜 기억을 가져가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웬만한 요구는 다 들어주려 했다. 그런데 선의가 반복되자 그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내가 해주는 일이 호의인지, 업무인지, 무리한 요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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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시작 한 달 전부터 중간관리자에게 말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연수생 15명을 혼자 운영하기는 어렵다고, 현장에 함께할 인원 한 명만 더 필요하다고. 하지만 돌아온 말은 “너만 바쁘냐”, “사업은 혼자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어떻게든 혼자 해내려고 했다. 그리고 결국 번아웃이 왔다. 연차를 쓰며 병원을 다녔고, 내가 겪은 일과 어려움을 모두 보고했다.

다행히 그 이후에는 10명 이상의 연수생이 오는 경우 2명 이상의 관리자가 동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때 생각했다. 조금 더 일찍 말했어야 했다고. 아니, 말하긴 했지만 더 분명하게 말했어야 했다고. “힘듭니다”가 아니라 “이 인원 구조로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운영이 어렵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다고.

주니어는 배워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참아야 하는 사람은 아니다. 모르는 것이 많다는 이유로 부당한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침묵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니어일수록 더 근거를 확인하고, 더 기록을 남기고, 더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그것이 일을 배우는 태도이자 나를 지키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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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세 있는 주니어를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주니어의 문제 제기를 버릇없음으로만 보는 조직은 오래 건강할 수 없다. 일을 함께하려면 직급보다 먼저 동료로 바라봐야 한다. 누군가의 침묵 위에 굴러가는 일은 결국 언젠가 무너진다.

나는 아직도 모든 순간에 단단한 사람은 아니다. 여전히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할 때 마음이 불편하고,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되묻는 날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과 나를 지우는 것은 다르다. 열심히 일하는 것과 무리한 요구를 감당하는 것도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