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위스키
출장의 연속으로 나고야에서 오키나와로 넘어가는 비행기 안에서 노트북을 꺼낸다. 에세이를 쓰려고 전원을 켜지만, 세상에 하늘 위에서도 인터넷이 된다고! 이러면 딴짓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참 세상 많이 좋아졌다 싶다. 처음 해외로 떠날 때는 기내에서 핸드폰 충전하기도 힘들었는데 정신 좀 차리니 조금 느리긴 하지만 인스타나 카톡은 할 수 있을 정도로 인터넷이 되는 걸 보다니. 내가 늙은 걸까 세상이 빨라진 걸까. 얼마 안 있으면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기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빨라지지 않을까. 에라 모르겠다 에세이는 무슨, 나중에 어떻게든 되라지.
(크롬 자동번역으로 보는 ANA 기내 와이파이 페이지. 예전엔 자동번역도 상상도 못하던 기능이었다)
돌이켜보니 참 많이 떠돌아다녔다. 유학, 군대, 대학원, 일을 하며 질릴 정도로 비행기를 탔고, 많은 지역, 나라, 도시를 경험했다. 처음으로 발급받은 10년 기한 여권의 모든 페이지를 채워보겠다는 작은 다짐도 비록 COVID-19때문에 조금은 늦어졌지만 그 끝을 눈앞에 두고 있다 (3.5페이지 남았다). 그 와중에 남미를 한 번도 못 갔고, 내가 휴가나 관광으로 해외를 여행한 게 한 손도 못 채운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랄까. 이렇게 세상을 빙글빙글 돌면서도 아직 더 돌고 싶으니, 우리 가족 역마살은 다 내가 가져갔지 싶다.
해외 사는 우리네 삶이 다 그렇지만, 한 나라에 와서도 생각보다 많이 이동한다. 출장은 당연하거니와 집을 옮겨야 할 경우도 종종 생기는데, 지금 내 사정이 그렇다. COVID-19 이후 외국인이 많이 들어온다고, 집주인이 월세를 40%나 인상했다. 내가 연장하면 조금 깎아주긴 하겠다는데 저 정도로 인상하면 그러나 마나. 방 빼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안 그래도 사무실에서 연말에 3개월 정도 다른 나라로 출장을 지시한 상황이라 빈집을 유지해야 하나, 아니면 친구들 보고 와서 있으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휴 돈을 더 올려? 아쉬움 없이 연장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자, 이제 또 짐 싸야지.
한 10년쯤 이런 삶을 살다 보니 짐을 싸는데도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반쯤 먹던 커피나 예전에 처리한 공과금 영수증, 되려 주는 사람이 민망할 너덜너덜한 잡품은 미련 없이 버리고, 동료와 친구에게 줄 주방기구나 식재료, 몇 안 되는 책은 방 한구석 박스에 모아둔다. 몇 되지 않는 옷과 가전제품, 칼 등 아끼고, 필요하고, 구하기 힘든 물품은 다시 한번 내 여행 가방으로 들어간다. 비행기를 탈것은 아니지만 나름 습관이 되어버린 23kg에 맞춰서.
(2009년 동네 월마트에서 50불 주고 산 내 가방. 같이 지구 몇바퀴는 돌았다)
짐을 싸며 생긴 습관도 있다. 크거나 너무 비싼 가구는 사지 않는다. 어차피 몇 년 쓰지도 못할 거를 고르는데 공을 들이기도 싫거니와, 이미 가구들이 다 있는 집을 구하는 게 훨씬 쉽고 떠나기도 편하다. 책도 그렇다. 옛날에는 무게를 감수하고서라도 필요한 책 몇 권을 꼭 골라 가져갔지만 요즘에는 무조건 전자책으로 구매한다. 페이지를 넘기는 즐거움이나 오래된 책에서 나는 향기를 느낄 수 없다는 건 매우 아쉽지만, 한 권이던 백 권이던 태블릿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은 떠돌이로써 도저히 무시할 수 없다.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아끼는 주방 칼, 커피 그라인더, 친구들이 준 선물과 편지는 옷과 약, 다른 사치품을 포기하고서라도 챙긴다. 특히 주방 칼은 무게가 꽤 되는데, 몇 년간 사 모으고 애용한 크고 작은 여섯 자루를 전부 들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요리를 자주 하느냐고 물으면 1초의 고민도 없이 아니라고 답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칼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는 이유는, 뭐 별거 있나. 그냥 좋아하니까 그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