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는 3, 6, 9년차로 위기가 찾아온다고들 한다. 나 역시 마의 3년 차를 막 넘기던 무렵, 그 위기를 세게(!) 직면했던 때가 있다. 매일의 출퇴근길이 그렇게 우울할 수 없었다. 뭘 좀 배운 것 같지만 모르는 것 투성이였고, 제안서니 보고서니하는 벅찬 아웃풋을 겨우 쏟아냈고, 제대로 된 인풋 하나 없이 스스로를 갉아먹던 시간들이었다. ‘내가 꿈꾸던 개발협력 커리어라는 게 이런 거였나…’ 회의감이 쌓이고 쌓여 나는 점점 더 지쳐갔고, 꼭대기만큼 높았던 기대치에서 떨어지며 아파했다.

퇴사와 유학 사이 고민에서 고민하던 나는 경제학 전공 야간대학원에 진학함으로써 ****슬럼프를 해결했다. 주변에서는 개발정책학이 더 쉽다거나 유학이 낫다는 등의 조언을 했지만, 일과 병행하며 경제학을 선택한 나만의 이유가 분명했다. 낮에는 제안서를 쓰고 밤에는 행동경제학 수업을 들으며 이런 인풋이라도 있어야 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효과가 있기도 했다. 수업을 들어야 하니 야근을 줄였고, 개발협력과 조금도 관계 없는 금융 업계 동기들과 술을 마시는 것도 환기가 되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 한 구석이 여전히 허전했다.

미시경제학 시험 준비 중. 2016.

미시경제학 시험 준비 중. 2016.

그러던 차에 PAO 제안을 받았다. ****PAO 제도가 낯설 독자에게 설명을 덧붙이자면, 우리 업계에는 KOICA의 국별협력 프로젝트마다 초급 전문가 및 주니어를 1명씩 선발하는 **PAO(Project Action Officer)**라는 특이한 포지션이 있다. 프로젝트 관리를 지원하는 것이 주된 업무인데, 사업과 기관마다 업무 범위가 각양각색이다. 그럼에도 나름 이 업계에서 주니어가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이기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포지션이기도 하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하필 고난이도 국가의 고난이도 사업이 걸렸다. 아프리카에서도 악명 높은 DR콩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농업 사업. 출장으로 해결되지 않는,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이상의 파견직.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전까지 매일 다른 책을 읽고 노트를 일기로 채우며 고민에 빠졌었다. 다니던 대학원은 어떻게 할지, 다시 프랑스어를 해나갈 수 있을지 등의 피상적인 고민들도 물론 있었지만 사실 뭘 좀 아는 듯 아무것도 모르는 4년차의 나는 그냥 두렵고 무서웠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괜찮을까.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선 계속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현장을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 이제껏 익힌 나의 역량을 발휘해보고 싶은 욕심.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경제학을 배우며 알게 된 지식보다, 현업에서 종사하며 익힌 스킬보다 더 간절하게 배우고 싶은 게 있었다. 그게 늘 나를 괴롭히던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두려움과 기대감이 온통 뒤섞인 마음. 그러던 중 영화관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Moana)를 봤다. 모아나는 남태평양 모투누이 섬 족장의 딸인데, 섬의 저주를 풀기 위해 한번도 가보지 않은 머나먼 바다로 떠나, 전설의 영웅 마우이와 함께 모험을 헤쳐나간다. 극 중에서 모아나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지의 바다로 떠나는데, 파도를 헤치며 부르는 노래 <How Far I’ll Go>에는 이런 가사가 등장한다.

Moana. Disney. 2017.

Moana. Disney. 2017.

See the line where the sky meets the sea, it calls me. 하늘이 바다와 만나는 저 선을 봐, 그게 날 불러

And no one knows, how far it goes. 그리고 아무도 몰라, 저기가 얼마나 먼지

If the wind in my sail on the sea stays behind me, 만약 내가 항해할 때 바람이 내 뒤에 있어 준다면

One day I'll know how far I'll go. 언젠가 난 알게 될 거야, 내가 얼마나 멀리까지 갈지.

큰 스크린 속 바다를 헤쳐나가는 소녀의 모습이 나와 겹쳐졌다. 마음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두렵고 망설여지는 모든 순간에도, 결국은 용기를 내는 것. 주변 사람들의 격려와 용기, 바다의 선택으로 그녀가 모든 모험을 마친 것처럼, 나도 결국은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모험을 떠나 성장해서 돌아오리라. 나만의 이유로 야간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던 것처럼, 나는 또 나만의 이유로 콩고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경험과 고민이 나의 돛에 바람이 되어주리라 믿었다. 그렇게 시작한 콩고에서의 PAO 생활은 분명 고되고 힘들었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인생의 선 중 중요한 점이 된, 성공적인 모험이었다.

Moana. Disney. 2017.

Moana. Disney.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