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는 어렵다. 본디 전하고 싶은 말을 조금 더 친숙하고 이해하기 쉽게 인식하도록 비유를 쓴다고는 하지만, 9회 말 투아웃 상황에서 마운드에 선 투수의 변화구처럼 뜻대로 제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스트라이크를 노렸던 공 하나가 의도치 않게 홈런으로 이어질 수 있듯이, 서로 이해하고 있는 바가 다르거나 처한 상황이 다르다면 비유는 – 당장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비유만큼 위험하다. 그런 까닭에 글을 쓰는 데에 있어서 함부로 비유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왔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배운 대로 살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비유를 좋아한다. 해학의 민족을 자처하는 우리는 촌철살인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기를 원한다. 상황을 엮어가는 재치와 짧은 순간도 놓치지 않는 눈치는 비유를 더욱 맛깔스럽게 살려낸다. 특히 책에서 본 문구나 영화의 대사를 인유(引喩)하여 말을 할 때는 오늘따라 나 자신이 더욱 유식해 보이는 것 같아 괜히 우쭐거려 보기도 한다. 하지만 못을 삼키면 나사를 뱉어낼 것 같은 배배 꼬인 소갈머리의 소유자인 나는 누군가가 맥락 없이 비유할 때면 괜히 심드렁해지고는 하는데, 특히 나는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라는 말을 인용하는 사람에게 편견이 있다.

해당 대사를 탄생시킨 영화 <부당거래> (출처: 씨네21)

해당 대사를 탄생시킨 영화 <부당거래> (출처: 씨네21)

애초에 이 대사는 영화 속 악역으로 등장하는 주양(류승범 분)이 자신의 비리를 무마하기 위한 상황에서 등장한다. ‘악당’이 ‘잘못’을 감추려고 할 때 쓰는 대사를 우리의 삶 어느 순간에 비유할 수 있을까? 남의 말 잘 안 듣고 속 좁은 삶을 살고 있을지언정 이 대사를 옹호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우리의 권리는 누군가의 호의에 의해서 지켜진 적도 없고,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타인의 호의를 갈구한 적도 없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아는 게 아니라, 원래 모든 순간 우리의 권리였다.

국제개발협력은 선의만을 전제로 이뤄지는 일이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 사는 사회에 선의는 필수다. 이것은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아무도, 아무에게도 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해당 대사가 극 중 인물의 성격과 상황을 잘 보여주는 명대사임은 틀림없지만, 우리는 비유를 쉽게 써서는 안 되듯이 현실에서 저 말을 쉽게 꺼내 놔서는 안 된다. 맥락 없이 사용된 비유는 홈런이 아니라 오히려 데드볼이 되어 우리를 위협한다. 특히나 다방면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고 소수를 보호해야 하는 우리에게 이 커다란 위협은 이제껏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의 협약을 꺼트리는 독으로 작용한다.

(출처: 게임 <친구 모아 아파트>)

(출처: 게임 <친구 모아 아파트>)

물론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마주할 때도 있다. 열심히 준비한 사업이 지역 사회의 호응을 얻지 못하며 외면당할 때 속으로는 진가를 알아주지 않는 상황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수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 지역 내 일부 구성원에게 지급되어야 하는 물품을 다른 사람이 탐낼 때면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양보 좀 해달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지원 대상과 수량을 충분하게 헤아리지 못한 내 탓이 크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로 마음을 닫아버린다면, 자신은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그것에 대해서 처벌은커녕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무소불위 권한을 가진 검사와 무엇이 다를까? (극 중 이야기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세상을 본다. 사람들은 타인을 돕는 일에 점점 더 인색해지고 자신의 선의에 대가를 바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며, 굳이 대가를 바란다면 기부금 영수증 정도겠다. 하지만 우리의 호의와 선의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니 자신이 누군가의 권리를 보장해 준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타인의 권리는 처음부터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볼모로 잡을 자격이 없다. 잘못된 비유는 맥락을 벗어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을 망가트린다, 그래서 비유는 어렵다.